유란시아서 재단 번역본 사이트       
유란시아서 4부 요약


< 전편          다음편 >
유란시아서 4차 개정 합본 - 용어 통합

5. 예수의 종교의 긍정적 본질
6. 마가단으로 돌아오다


제 159 편
데카폴리스 여행



. 중도자 위원회
. 활동시기 : 29년 8월 18일 ~ 9월 16일
. 장소 : 데카폴리스


159:0.1 예수와 열두 사도가 마가단 공원에 도착했을 때, 여인단까지 포함하여, 1백 명의 전도사와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는 8월 18일 (목), 각 사도가 전도사 한 명과 함께 일해야 하며, 열두 집단이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수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여인단과 다른 제자들은 예수와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이 여행에 4주를 배당하였고,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9월 16일에 마가단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이 여행을 통해서 내내, 병 고치는 기적이나 다른 특별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Top

 

 

1. 용서에 관한 설교

159:1.1 히포에서 한 제자의 물음에 답하면서 예수는 용서에 관하여 가르쳤다.

“마음이 친절한 어느 사람이 양 1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으면, 즉시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지 않겠느냐? 회개할 필요 없는 올바른 아흔아홉 사람보다 뉘우치는 죄인 하나를 하늘에서는 더 크게 기뻐한다. 아버지는 저희가 뉘우치려고 생각하기도 전에 찾으러 나가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한다. 너희가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없어도 집단행동에 관하여 법을 제정해도 좋으니 두셋이 찬성하여 내게 요청하고 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면 이루어질 것이다. 믿는 사람 두셋이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 가운데 있다.”

시몬 베드로는 히포에 있는 일꾼들을 책임진 사도였다. 베드로: “주여, 내 형제가 자주 내게 죄를 짓는다면 얼마나 자주 그를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될까요?” 예수: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한 우두머리 집사가 1만 달란트를 임금에게 빚을 지었는데, 갚을 수 없어 탄원하였다.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다.

“이 우두머리 집사가 임금에게 탕감받은 후, 자신에게 1백 데나리온을 빚진 하급 집사에게는 멱살을 잡고 '네가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 하며 그 집사를 감옥에 던졌다. 동료 종들이 임금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하였고, 그 임금은 이 사람에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 같이 너는 동료 집사에게 왜 자비를 베풀지 않았느냐?’ 그 임금은 그 우두머리 집사가 빚진 것을 모두 갚을 때까지 가두라고 명하였다. 하늘나라의 좋은 것들을 여러분이 거저 받았으니 땅에 있는 동료들에게 거저 주어라"

159:1.6 예수는 사람이 동료를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위험함을 가르쳤다. 예수는 입법과 사법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게 맡겼다. 예수는 언제나 불공평ㆍ앙갚음ㆍ복수의 요소를 최소로 줄이려고 애썼다.

[자비와 참을성의 예로 일흔일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성서에서 유래한 것으로, 라멕이 그의 아들 두발 가인의 금속 무기와 적들의 무기를 비교하면서, ‘나는 이제 일흔일곱 배 원수를 갚겠다”하고 외친 데서 유래한다.]

▲Top

 

 

2. 이상한 설교자

159:2.1 예수는 요한과 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찾아보러 가말라로 갔다. 요한: “주여, 어제 당신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던 사람이 악귀들을 내쫓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친구는 우리와 한 번도 함께 있은 적이 없었고 우리를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일을 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예수: “그를 막지 말라. 내 이름으로 큰 일을 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궁극에는 우리 운동을 지지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분명히 저희는 나를 나쁘게 평하지 않을 것이다. 후세에는 자격 없는 사람이 내 이름으로 이상한 일을 많이 할 것이나 나는 막지 않을 것이다.”

이 지시는 요한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 하는 주의 말씀을 전에 그가 들었었다. 이 경우에는 사람과 영적 가르침 사이에 개인적 관계를 언급한 것이었고, ‘막지 말라’ 는 말씀은 앞으로 생길 세계적 단체, 신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했다는 것을 요한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도들은 감히 주의 이름으로 가르친 자들에게 여러 번 화를 냈다. 예수 밑에서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 감히 그의 이름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언제나 그들에게 못마땅해 보였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일하여, 요한이 막은 이 사람은 사도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노력을 계속하였고, 예수가 고쳐준 미친 사람, 악령들이 돼지 떼에 들어갔다고 믿은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Top

 

 

3. 선생들과 신자들을 위한 가르침

159:3.1 토마스와 그 동료들이 수고했던 에드레이에서 예수는 낮과 밤을 보냈다. 그는 진리를 전도하는 자들을 안내하고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이 행동할 원칙을 주었다. 현대의 말투로 간추리면 이렇다.

언제나 사람의 성격을 존중하라. 압도하는 논리와 우월한 정신력으로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들어가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지성을 단순히 논리의 무게로 짓밟거나, 재빠른 웅변으로 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단순한 감상에 호소해서도 안된다. 사람들에게 호소할 때 공정해야 한다. 자제하고 마땅한 절제를 보여야 한다. 내가 말한 것을 기억하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갈 것이다.”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오면서 자존감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 복음의 목적은 자존감을 잃은 자를 회복하게 하고 강한 자는 절제하는 것이다. 생활에서 칭찬할 것들은 인정해야 한다. 자존감을 잃은 자가 찾고 싶어 할 때, 자손심을 회복하기 위해 나는 어떤 일도 서슴치 않을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겁이 많고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들의 자존감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게으름은 자존심을 파괴한다. 따라서 형제들이 자기가 택한 일을 하는 데 늘 바쁘게 지낼 것을 강조하고, 직업을 찾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해야 한다.

겁을 주어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몰려고 애쓰는 것처럼 비열한 술책을 사용해선 안된다. 애정을 가진 아버지는 겁을 주어 아이들에게 정당한 요구에 복종하게 만들지 않는다.

159:3.6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곳으로 가도록 이상하게 감명을 받는 것이 안에 깃드는 영이 이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육신을 입은 인생으로부터 영적으로 사는 상급 생활로 옮겨가는 사람은 갈등을 겪는다. 한쪽 영역 안에서 사는 자에게는 거의 갈등이 없으나, 모든 사람이 과도기에는 얼마큼 불안을 겪는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면서, 너희는 그 나라의 책임을 벗거나 그 의무를 피할 수 없지만, 기억하라: 복음의 멍에는 쉽고 진리의 짐은 가볍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사는 바로 그 하나님을 찾다가 죽는다. 믿음은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요, 생명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자에게 오직 투쟁이 있으니, 즉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는 것이다. 즉 의심―불신―을 이기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앞에서 정말로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고의적인 악행과 죄악의 반란이 있는 곳에서는 똑같이, 사정없이 용서하지 않는다.

너희의 선생을 슬픈 사람으로 묘사하지 말라. 우리는 좋은 소식이 담긴 말씀을 선포하고, 변화시키는 그 힘은 사람들에게 퍼진다. 우리의 종교는 새 생명과 새 의미로 고동친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가슴 속에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다.

159:3.11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데 빠져서는 튼튼한 인품을 기를 수 없다. 생활의 시련 앞에서 겨우 마지못해 버티는 비겁한 사람에게 지나친 동정을 삼가며, 담대하고 용감한 자에게 동정을 베풀라. 한 번 싸우지도 않고 자기 문제 앞에 드러눕는 자를 위로하지 말라.

내 자녀들이 일단 하나님이 앞에 계시다는 확신을 스스로 의식하게 될 때, 그러한 믿음은 시야를 넓히고, 혼을 고귀하게 만들고, 성격을 단련하며, 행복을 키우고, 영적 이해를 깊이 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을 키워준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어쩌다 생기는 사고나 보통 재앙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가르치라. 복음을 믿는 것은 곤경에 빠지지 않을 터이나, 고난이 덮칠 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리라. 나는 역경의 바다에서 너희를 구하리라 약속하지 않지만, 그 모든 역경을 통해서 너희와 함께 갈 것을 약속한다.

듣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했고, 자리에 없던 사도와 제자들에게도 이 말씀을 되풀이했다.

▲Top

 

 

4. 나다니엘과 한 이야기

159:4.1 예수는 나다니엘과 그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아빌라를 방문했다. 인정받는 히브리 성서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듯한 예수의 몇 가지 선언에 나다니엘은 몹시 신경이 쓰였다. 나다니엘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예수를 모시고 가서 물었다. “주님, 성서에 대한 진실을 알기 원합니다. 당신은 성서의 좋은 일부분만 인용합니다. 율법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취지의 랍비들의 가르침을 당신이 배척한다고 나는 생각됩니다. 성서에 관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갈피를 못잡는 사도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다니엘, 너는 바르게 판단하였다. 나는 성서를 랍비들처럼 바라보지 않는다. 이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너희 형제들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너와 이야기 하겠다. “모세의 율법에 담긴 말씀과 성서의 가르침은 아브라함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근래에 와서 겨우 지금의 성서가 수집되었다. 유대 민족의 상급 사상을 담고 있어도, 아버지의 성품과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하늘나라 복음을 위해 이삭을 줍듯 더 나은 가르침 중에서 진실을 골라야 한다.

“이 여러 기록은 사람들이 쓴 것이다. 일부는 거룩하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 성서의 가르침은 그 기원이 있던 시절에 관점과 깨달음의 정도를 나타낸다. “진리로서 나중 것은 먼저 것보다 더 신뢰할만하다. 성서는 결함이 있고 전적으로 인간의 기원이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지혜와 영적 진리 중에 최고의 집합체를 이루고 있다.

“책들 가운데 책들이 지닌 이름대로 본인이 쓰지 않았어도 책에 담긴 진리의 가치를 전혀 떨어뜨리지 않는다. 요나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도, 이 이야기의 깊은 진리, 곧 하나님이 니느웨와 이교도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눈에 여전히 귀중하다. 성서는 참인 것들을 많이 담고 있으나 이 기록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잘못 대표하는 많은 것을 또한 담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다니엘, 선조들이 ‘싸움터에 나가서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도륙하라’고 하나님이 지시했다는 기록은 믿지 말라. 그러한 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서는 기록자들의 지적ㆍ도덕적ㆍ영적 상태를 언제나 비쳐 왔고, 언제나 그럴 것이다. 성서의 의도는 종교적 교육과 영적 안내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159:4.6 “가장 개탄스러운 것은 성서가 절대 완전하고 가르침에 오류가 없다는 잘못된 생각과, 전통에 노예가 된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혼란스럽게 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성서의 영감, 잘못된 교리, 둘 다 사용하리라. 나다니엘, 절대 잊지 말거라. 아버지는 진리의 계시를 어느 한 세대, 어느 한 민족에게만 국한하지 않는다. 진리를 찾는 많은 사람이 성서의 완벽성, 혼란스런 교리에 낙담하며, 또 계속 그럴 것이다.

“거룩한 옛 사람들이 영감을 받고 영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저희의 말씀이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떠난 후 내 가르침을 놓고 서로 다투며 갈라질까 걱정하여 이 가르침을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 만들기를 피하고 진리를 행하는 것이 이 세대에게 최선일 것이다.

“나다니엘, 사람의 머리를 통해서 신성한 진리는 정말로 빛을 낼지 모르지만 언제나 그것은 비교적 순수하고 부분적으로 신성할 뿐이다. 사람은 잘못이 없기를 갈망할 수 있지만 오직 창조자들만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성서에 관한 가르침 중 가장 큰 착오는 성서가 봉인된 (누구도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교리이다. 신성한 진리의 계시는 인간의 무지, 편견, 좁게 생각하는 불관용이 아니면 봉인되지 않는다. 성서의 빛을 오직 편견으로 가리고 미신으로 어둡게 만들고 있다.

“가장 슬픈 것은 이 전통이 신성하다고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더러가 이 진실을 알면서 다르게 가르치는 것이다. 저희는 그 신성한 기록이 다른 세대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도덕적 지혜, 종교적 영감, 영적 가르침의 지침서라고 호소하지 않고, 성서를 달리 해석하고 왜곡하며, 성서가 일상 생활의 깨알 같은 세부를 담은 안내서라며 비영적인 권위의 책으로 만들고 있다.”

159:4.11 나다니엘은 주의 선언에 깨우쳐졌고, 또 충격을 받았다. 오랫동안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이를 곰곰이 생각했고, 주의 승천 후까지 이 회담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 이후에도 주의 말씀 전체를 전하기를 두려워 했다.

▲Top

 

 

5. 예수의 종교의 긍정적 본질

159:5.1 필라델피아에는 야고보가 일하고 있었는데, 예수는 이곳에서 하늘나라 복음의 긍정적 본질에 관하여 가르쳤다. 야고보가 물었다: “주님, 성서로부터 좋은 구절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습니까?” 예수가 대답했다 : “성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이 영원히 참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가르침을 찾아보라.

“오, 주님, 제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주는 나의 목자이시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의 오른손을 붙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나라들이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159:5.7 이것이 예수가 히브리 성서의 노른자를 하늘나라 복음의 배경으로 쓴 예를 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은 그의 종교의 총합이요 요점이 되었다. 예수는 유대 종교의 최고를 가져다가 하늘나라 복음의 새 가르침에서 쓸 만한 배경으로 바꿔놓았다.

예수는 유대 종교의 소극적 교리 속에 긍정적 행동 정신을 집어넣었다. 예수의 종교는 그 복음이 요구한 것을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데 있다.

예수는 서슴지 않고 성서에서 더 좋은 반쪽을 이용했고, 한편 못한 부분을 거부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의 큰 훈계는 ‘너는 네 민족의 아이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기록한 성서로부터 고른 것이다. 예수는 부정적 부분을 물리치면서 이 성서의 긍정적 부분을 이용했다.

예수는 “참된 선은 가장 지독한 악보다 변함없이 훨씬 더 힘이 있음을 잊지 말라.” 주는 의의 긍정적 표준을 가르쳤다: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자신을 외면하고 나를 따르기 위하여 날마다 책임을 한껏 지라.” 추종자들에게 자기 책임을 참을성 있게 지라고 훈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간적 책임과 신성한 특권을 한껏 수행하기 위하여 에너지와 열심을 가지고 책임을 지라고 하였다.

159:5.11 사람이 겉옷을 부당하게 빼앗을 때 다른 옷도 내밀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때, 예수는 옛 충고―”눈에는 눈으로”―대신에 행악자를 구원하려고 긍정적인 무슨 일을 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악에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음을 가르쳤다:

1. 악을 악으로 갚는 것―적극적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방법.

2. 불평 없이 저항하지 않고 악을 견디는 것―부정적인 방법.

3. 악을 선으로 갚는 것―긍정적인 의의 방법.

사도들 중에 하나가 물었다: “주여, 어느 낯선 자가 짐을 지고 1마일(약 1.6Km)을 가라 강제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 “소리를 죽여 그 낯선 자를 헐뜯으면서, 앉아서 위안을 얻으려 한숨을 쉬지 말라. 올바름은 수동적 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생각할 수 없거든, 적어도 그 짐을 2마일은 더 나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부당하고 사악한 낯선 사람에게 분명히 도전이 되리라.”

159:5.16 유대인은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들은 적이 있지만, 예수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먼저 죄인을 찾아 나서며, 그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기꺼이 돌아오려고 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기뻐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듣지 못했다.

예수는 화려한 언어를 피하고, 작은 표현 속에 큰 의미를 넣는 버릇이 있었다. “소경을 이끄는 소경”처럼 그의 그림은 놀라웠다. 예수는 종교의 철학을 하늘로부터 땅까지 가져왔다. 그는 새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사랑을 새로이 줌으로 혼의 근원적 필요를 묘사했다.

▲Top

 

6. 마가단으로 돌아오다

159:6.1 데카폴리스 4주 동안의 임무는 성공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받아들였고, 사도와 전도사들은 예수가 없어도 일을 수행하는 값진 체험을 가졌다.

9월 16일에, 일꾼들이 전부가 마가단 공원에서 미리 주선하여 모였다. 안식일에 1백 명이 넘는 신자들의 회의가 열렸고, 거기서 하늘나라의 일을 확장하기 위하여 앞날의 계획이 충분히 고려되었다.

예수의 추종자들 중 아무도 전령단의 값진 수고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전령단은 예수가 사도들과 연락을 유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자금을 모으는 자로서, 예수와 동료들, 또한 열두 사도와 열두 전도사의 가족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일했다.

이 무렵에 아브너는 활동 본부를 헤브론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겼다. 여기는 또한 유대 지방에서 다윗의 전령들의 본부였다.

예수와 동료들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수고하는 시기를 개시하기 전에, 한 주 동안 휴식을 취하였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