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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 4부 요약


< 전편          다음편 >

3. 이방인의 형편
4. 이방인의 철학
5. 이방인의 종교

 

 

제 121 편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 안드레에서 부속되었던 2차 중도자


121:0.1 나는 12명으로 구성된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회의 한 위원회의 감독 밑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한때 사도 안드레에게 부속되었던 2차 중도자로, 나사렛 예수의 생애 사건들을 기록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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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 이후 1세기의 서양


121:1.1 예수가 태어날 때 유란시아는 어느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했던 영적 생각과 종교 생활의 부흥을 겪고 있었다.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서양과 근동에 퍼졌으며, 레반트 종족인 유대인은 동.서양의 기질을 갖고 있어서, 양쪽에 새 종교를 효과적으로 퍼뜨리기 위하여 문화와 언어의 배경을 이용하기에 적절하였다. 더구나 로마인의 관대한 정치도 한 몫 하였다.

이러한 조합은 바울의 활동에 잘 나타난다. 그는 종교적 교양 면에서 뛰어난 히브리인이었고, 그리스어로 유대인 메시아의 복음을 선포했으며, 로마 시민이었다.

121:1.3 예수가 살던 시절의 유럽의 문명은 그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도 전혀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특별한 세 가지 영향 밑에서 통일되고 조정되었다:

1. 로마의 정치 및 사회 체계.

2. 그리스 언어와 문화, 철학

3. 유대인의 급속히 퍼지는 종교적ㆍ도덕적 가르침

121:1.7 예수가 태어났을 때, 지중해 세계 전부가 통일된 제국이었다. 좋은 도로들이 많은 주요 도시를 연결하였다. 바다에는 해적들이 없어졌고, 무역하고 여행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럽은 그리스도 이후 19세기까지 이러한 시대를 다시 구경하지 못했다.

그리스ㆍ로마 세계는 안으로 평화롭고 겉으로 번영하고 있었는데도, 제국 주민의 대다수는 더러움과 빈곤 속에서 시들었다. 그 시절에는 행복하고 번영하는 중류 계급이 없었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동.서양의 번영과 평화, 광범위한 상업적 교역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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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대 민족


121:2.1 그리스도 이후 1세기 전반에, 유대인은 셈 종족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우연히 특이하게도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했다.

팔레스타인은 동·서양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3대륙의 교차로가 되었다. 아득한 시절부터 배들은 이 지역을 거쳐 화물을 온 서양의 해안으로 날랐고, 카라반 교통의 반 이상이 갈릴리의 나사렛이나 그 근처를 통과했다.

유대인은 세계에서 바깥으로 나가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살면서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의 어느 지방에서나 장사하고 있었다.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했고, 로마는 길을 만들고 하나의 제국을 통일했다. 유대인은 로마 세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2백이 넘는 회당과 잘 조직된 종교 공동체와 함께, 후일에 복음이 세상의 가장 먼 구석까지 퍼지게 했다.

유대인 회당은“경건한” 이방인 신도들을 받아들였는데, 바로 이 소수의 전향자들 사이에서 바울은 초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을 얻었다. 안티옥에서 바울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렀다.

121:2.6 유대인의 성전 예배를 예루살렘에 집중한 것은 그들의 일신교가 살아남게 만든 비결이었고, 마찬가지로 만국의 그 유일한 하나님, 만인의 아버지를 전하는 새롭고 확대된 개념을 육성하고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보장했다.

이 시절의 유대 민족은, 로마의 치하에 있었어도 상당한 정도로 자치를 누렸고 더욱 큰 구원자, 오래도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곧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팔레스타인이 반 독립된 국가로서 살아남은 것은 로마 정부의 대외 정책에 있었다.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양육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어쩌다가 얻은 이 자유와 독립을 유대인은 그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야웨가 직접 간섭한 덕분으로 돌렸다. 그들은 정치적 사명이 아니라 영적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두미아인 헤롯은 헤롯은 히브리인의 예식 절차에 충실할 것을 공언했으나, 낯선 신들의 신전 건축을 진행했다. 그래서 예수가 살던 시절에 유대인은 특별히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았다.

헤롯과 로마의 지배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유대인이 세계를 여행하기에 안전하게 만들었고,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가지고 유대인이 더욱 침투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헤롯의 통치는 또한 히브리 철학과 헬라파 철학이 더욱 섞이는 방향으로 크게 기여했다.

121:2.11 헤롯은 케자리아 항구를 지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을 문명 세계의 교차로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기원전 4년에 헤롯이 죽고, 그 아들 헤롯 안티파스 아버지처럼 위대한 건축가였고, 중요한 무역 중심 세포리스를 포함하여, 갈릴리의 많은 도시를 다시 지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와 율법 선생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갈릴리는 유대인 지역이기보다 이방 에 더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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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방인의 형편


121:3.1 로마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조건은 높은 수준은 아니더라도, 평화와 번영은 미가엘의 수여에 적당하였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사회는 다섯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1. 귀족 계급. 돈과 공식 권력을 가진 상류 계급, 특권을 가진 통치 집단.

2. 상업 집단. 거상과 은행가, 무역상―큰 수입ㆍ수출상―국제 상인.

3. 작은 중류 계급. 이 집단은 초대 기독교 교회의 정신적 뼈대를 마련해 주었다. 유대인 가운데 많은 바리새인이 이 계급의 상인에 속했다.

4. 자유 노동자 계급. 이 집단은 거의 사회적 지위가 없었다. 자유롭지만 노예 노동과 경쟁해야만 하는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5. 노예. 로마 국가 인구의 절반은 노예였고, 다수가 우수한 사람이었고, 그들은 빨리 진출해서 자유 노동자, 상인들 틈에도 끼었다. 대다수는 평범하거나 아주 열등했다.

121:3.7 노예 제도는 로마의 군사정복의 특징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한은 무제한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하층 계급과 이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우수한 노예들은 흔히 임금을 받았고, 소득을 저축해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해방된 많은 그런 노예는 국가ㆍ교회ㆍ상업계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 바로 그런 가능성이 초대 기독교 교회가 이 수정된 형태의 노예 제도를 그토록 묵인하게 만들었다.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에는 널리 퍼진 사회 문제가 없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사회적 지위에 만족했다.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도 억압받는 계급을 개선하기 위한 경제 운동이 아니었다.

여자는 팔레스타인에서 신분에 제한을 받은 것보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자유를 누렸지만, 유대인이 가족에게 바치는 헌신과 자연스러운 애정은 이방 세계보다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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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락주의의 대표자는 에피큐로스
(기원전 342-271)

 

* 크리씨포스(기원전 281-208년)에
아테네에 금욕주의파 학원을 설립.


 

* 첫 견유학파 철학자는
안티스테네스(기원전 450-370년)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4. 이방인의 철학


121:4.1 이방인은 대체로 유대인보다 도덕 수준이 낮았으나, 기독교의 씨앗이 싹트고, 도덕적 인격과 영적 성취의 수확을 풍부히 거두는 것이 가능했다. 이 때 이방 세계에 4대 철학이 유행하였는데, 모두가 그리스인 플라톤 사상에서 어느정도 파생되었다.

1. 쾌락주의자. 행복을 추구했으나, 지나친 육욕에 빠지지 않았다. 사람이 노력하면 현세에서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무지한 미신을 효과적으로 퇴치하였다.

2. 금욕주의자. 금욕주의는 상류 계층이 지녔던 우수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는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했고, 종교가 되지 못했고, 하나의 철학으로 남았다. “나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그에 만족하기를 배웠노라”하고 기록했을 때, 바울은 금욕주의에 깊이 젖어 있었다.

3. 견유학파. 견유학파의 철학 교리의 상당부분은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다. 들에서 시장에서, 이들은 “사람은 자기가 원하면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교리를 줄곧 전파했다. 떠돌이 견유학파 전도사들은 영적으로 갈급한 민중을 후일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4. 회의주의자. 회의주의는 지식은 허위요, 확신과 보장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 태도였고, 결코 널리 퍼지지 않았다.

121:4.6 이 여러 철학은 종교에 준하는 것이었다. 활력을 불어넣고 윤리적이고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대개는 서민의 수준을 넘었다. 견유주의를 제외하고, 강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위한 철학이었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도 구원을 주는 종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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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방인의 종교


121:5.1 이전의 시대 전체를 통해서, 종교는 주로 부족이나 국가의 일이었다. 신들은 개인이 아니라, 부족이나 민족을 상대하였다. 그러한 종교 체계는 개인의 영적 열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예수의 시절에 서양의 종교는 다음과 같았다.

1. 이교도의 종파. 이 종파들은 헬라인과 라틴 족의 신화ㆍ애국심, 전통의 조합이었다.

2. 황제 숭배. 유대인과 초대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을 몹시 분개하였고, 이것은 로마 정부의 모진 핍박을 받게 만드는 직접 원인이었다

3.점성술. 바빌론의 이 사이비 과학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 두루 종교로 발전되었다. 20세기에도 사람은 이 미신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4. 신비 종파. 영적으로 갈급한 세계에 이상한 종교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이들에게 개인의 구원을 약속했다. 이 종교들은 급속히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하류 계급이 받아들인 신앙이 되었다. 이 종교들은 기독교가 급속히 퍼지도록 길을 예비하였다.

121:5.7 신비 종교들은 민족 신앙의 종말을 가져왔고, 개인을 상대하는 수많은 종파를 탄생하게 하였다. 신비교는 모두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 신화 같은 전설에서 유래한다. 미트라교의 가르침이 보여주다시피, 대체로, 이 신비는 어떤 신(神)의 일생ㆍ죽음ㆍ부활 이야기와 상관이 있었다.

2. 신비교들은 민족 종교가 아니고 종족을 초월하였다. 개인적이고 친교하는 종파였고, 그 결과로 종교적 친목 사회와 수많은 종파 사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정교한 입회 예식, 예배 드릴 때 인상적인 성찬식의 특징을 가졌다. 이들의 비밀 의식과 예식은 복잡하고 피 흘리는 제사가 있다.

4. 이 신비교들은 변함없이 신도들에게 구원, “악에서 벗어나고, 사후에 살아남고, 슬픔과 노예 제도가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서 행복한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 것”을 약속했다.

121:5.12 신비교들이 유행한 것은 사람이 사후에 살아남기를 추구한 것과, 종교와 개인의 올바름을 진정하게 갈망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이런 소망을 채워주지 못했지만, 후일에 예수가 나타나는 길을 예비했고, 이 예수는 참으로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신비 종교에 널리 집착한 것을 이용하려고,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고쳤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절충한 것조차 (기독교) 최선의 신비 종파들보다 다음 이유로 더 우수하다:

1. 바울은 도덕의 회복, 즉 윤리적 구원을 가르쳤다. 기독교는 새로운 삶을 향하게 하고 새로운 이상을 선포했다. 바울은 요술 의식과 예식의 마술적 요소를 버렸다.

2.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에서 슬픔, 그리고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구원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는 것도 약속했고, 이에는 영원히 살아남는 올바른 인품의 부여가 뒤따랐다.

3. 신비교는 신화에 기초를 두고 세워졌지만, 바울이 전파한 기독교는 인류에게 미가엘, 즉 하나님의 아들이 수여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었다.

이방인 사이에서 도덕은 반드시 철학이나 종교와 관련되지 않았다. 유대인의 종교, 다음에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그 뒤에 발전하는 바울 판의 기독교는 한 손에 도덕을 다른 손에는 윤리를 쥐고서, 신자들이 이 두 가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유럽의 종교였다.

그토록 어설픈 철학 체계에 영향을 받고, 그렇게 복잡한 종교의 종파들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 그런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그는 개인적 종교―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르치는―복음을 바로 이 세대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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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히브리 종교


121:6.1 그리스도 이전 1세기가 막을 내릴 때가 되자, 예루살렘의 종교 사상은 그리스 문화의 가르침과 그리스 철학에서 큰 영향을 받고 얼만큼 수정되었다. 서양과 레반트는 대체로 수정된 헬라파 관점을 채택하였다.

예수의 시절에는 서민들은 아람로, 사제와 랍비들은 히브리어, 교육받은 계급과 상류 계층의 유대인은 대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유대주의의 부흥은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긴 데서 비롯된다. 이 영향으로 바울의 기독교는 서양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헬라화된 유대인의 신앙은 플라톤의 철학, 그리고 극기를 가르치는 금욕주의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통합한 필로의 가르침이 예수가 살고 가르치던 때에 팔레스타인에 유행하였다.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다. 모세 이후로 서양 세계의 윤리 및 종교 사상에 그렇게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당대의 윤리와 종교적 가르침의 체계 속에 있는 뛰어난 일곱 선생이 있었으니, 곧 세타드ㆍ모세ㆍ조로아스터ㆍ노자ㆍ부다ㆍ필로ㆍ바울이다.

필로는 오직 피를 흘려야 용서받는다는 교리를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바울의 원죄 교리의 기원은 미트라교에 있고, 이는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이나 또는 예수의 가르침과 거의 공통점이 없다. 어떤 단계는 바울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다.

121:6.6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인 요한 복음은 서양 민족들을 향하여 말한 것이었고, 후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의 관점에 비추어 이야기를 엮었는데, 이들은 또한 필로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가 살던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하여 이상하게 감정이 악화되었다. 지독한 박해의 물결이 퍼져 나갔고, 로마에서는 수천 명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제국 정부는 제국 전역에 걸쳐 유대인의 자유를 회복시켰다.

넓은 온 세계에 두루, 상업이나 박해로 인하여 유대인이 어디에 흩어져 있든지 상관 없이, 모두가 하나 같이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전에 마음을 두었다. 유대인의 신학은 예루살렘에서 해석하고 실천한 대로 살아남았다.

250만에 이르는 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민족의 종교적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오곤 했다.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이 그들의 예배의 중심이라는 것, 그리고 메시아가 올 것을 늘 기대하는 의견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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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대인과 이방인


121:7.1 유대인은 이방인의 생활 방식을 경멸하였다. 율법을 숭상했고 일종의 독선에 빠졌으며, 메시아가 온다는 약속에 대하여 굳은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이는 확고하고 영원히 고정된 것이었다.

그들은 이방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야웨를 기꺼이 함께 섬기려 하지 않았고, 새롭고 이상한 교리를 가르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의식과 율법주의의 무서운 사슬에 유대인을 묶어놓았고,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전통의 요구에 똑같이 묶여 있었다. 그들의 신성한 전통을 주제넘게 무시하고, 오랫동안 지켜 왔던, 사회의 행동 규칙을 감히 조롱한 사람을 단번에 물리친 것은 당연하다.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이고, 그들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되자, 이름 있는 선생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풀이한 말씀은 기록된 율법 자체보다도 더 높은 권한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은 유대인이 종교의 자유와 영적 해방을 부르짖는 새 복음의 전령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야 할 율법”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고,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서 살 새 영”에 관하여 말했으며,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이 “사람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고 올바른 영을 다시 새롭게 할 것”을 기도했다. 종교적 발전의 움직임은 서쪽, 유럽 민족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121:7.6 이 신학은 그리스인의 철학, 로마인의 법, 히브리인의 도덕과 함께, 인격의 신성함과 영적 해방을 주장하는 복음, 바울이 형성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복음을 담은 체계의 가르침이었다.

유대인은 역사를 하나님―일하는 야웨―의 섭리라고 보았다. 그리스인은 좀더 뚜렷한 영생 개념을 도입하였다. 바울의 교리에 담긴 신학과 철학은 예수의 가르침 뿐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의 영향도 받았으며, 그리스도 뿐 아니라 금욕주의자로부터도 영감을 받았다.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안티옥 기독교 종파에 담겨 있는 바와 같이, 다음의 가르침과 섞이게 되었다:

1. 유대교로 전향한 그리스인의 철학 논리. 이것은 영생 개념을 얼마큼 포함한다.

2. 유행하던 신비주의 종파들의 매력 있는 가르침, 특히 어떤 신이 희생물을 바침으로 사람을 되찾고, 속죄하고 구원한다는 미트라교의 교리.

3. 자리잡힌 유대 종교의 탄탄한 도덕성.


121:7.12 예수가 살던 시절에 지중해에 인접한 민족들은 모두, 세계의 지리ㆍ천문ㆍ건강ㆍ질병에 관하여 투박한 원시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좋은 영과 나쁜 영이 인간에게 깃들고, 심지어 돌과 나무에도 영이 있다고 보았다. 이때는 마술에 홀린 시대였고, 누구나 기적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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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전에 쓴 기록 - 신약 4 복음서


121:8.1 받은 지침에 어긋나지 않는 한, 우리는 예수의 일생과 관련있는 기존의 기록을 이용하고 어느 정도 조정하려고 애썼다. 미가엘이 수여하던 시절에 땅에 있었던 광대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특히 지금은 성격이 된 그의 조절자)의 협조를 받았지만, 마태ㆍ마가ㆍ누가ㆍ요한 복음이라 칭하는 복음들을 이용하는 것도 우리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신약 기록은 다음 상황에서 그 기원을 가졌다:

1. 마가가 쓴 복음. 요한 마가는 베드로의 격려를 받고, 로마에 있던 교회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서 이 글을 썼다. 주가 땅에서 육신을 입었을 때 자신의 가르침을 한결같이 기록하지 않으려 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마가는 사도와 기타 유력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가르침을 기록하기를 망설였다. 마가는 서기 67년, 베드로가 죽기 전에 짧은 기록을 많이 적어 놓았고, 베드로가 인가한 줄거리에 따라서,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고 난 바로 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복음은 서기 68년에 완성되었다. 그 뒤에 상당히 수정되었고 수많은 구절이 삭제되었으며, 최초의 복음에서 마지막 5분의 1은 처음 원본으로부터 베끼기도 전에 없어졌는데,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후일의 어떤 사건들이 끝에 첨가되었다. 마가가 쓴 기록은, 안드레와 마태의 노트와 함께,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을 그리려고 애쓴 모든 후일의 복음 이야기 기록에 기초가 되었다.

2. 마태의 복음. 이 복음은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주의 일생에 관하여 적은 기록이다. 마태 복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 묘사하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크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사도 마태는 이 복음을 쓰지 않았다. 마태의 제자 이사돌이 썼는데, 이사돌은 마태의 기억뿐 아니라, 주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직후에 마태가 써놓았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저서를 마태의 것으로 돌린 데에는 아무런 속일 뜻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제자들이 스승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121:8.6 마태가 최초에 쓴 기록은 그가 복음 전도에 들어가려고 예루살렘을 떠나기 바로 전에, 서기 40년에 편집되었고 여기에 다른 것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사사로운 기록이었고, 그 마지막 사본은 서기 416년에 시리아의 어느 수도원이 불탔을 때 사라졌다.

이사돌은 서기 70년에 타이투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직전에 피하여, 마태의 노트 사본을 펠라로 가져 갔다. 71년에, 펠라에서 사는 동안, 이사돌은 마태 복음을 썼다. 그는 또한 마가의 이야기에서 처음 5분의 4를 가지고 있었다.

3. 누가가 쓴 복음. 피시디아 지방의 안티옥에서 살던 의사 누가는 바울이 개종시킨 이방인이었고, 주의 일생에 대하여 아주 다른 이야기를 적었다. 그는 바울이 죽을 때까지 이 기록을 복음서로 만들지 않았다. 누가는 아카이아에서 82년에 기록했다.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쓰려고 계획했으나 이 작업에서 둘째 책, “사도들의 행적”을 마치기 바로 전, 서기 90년에 죽었다.

누가는 먼저 바울이 그에게 전해 준, 예수의 일생 이야기에 의존했다. 어떤 면에서, 바울에 따른 복음이다. 누가는 예수의 일생에서 기록하는 수많은 사건의 증인을 몇십 명 만나서 물어보았을 뿐 아니라, 또한 마가의 복음의 처음 5분의 4의 사본, 그리고 이사돌의 기록, 또 세데스가 78년에 만든 기록과 안드레가 적었다고 하는 편집된 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4. 요한의 복음. 요한 복음은 다른 기록에 담겨 있지 않은, 유대 땅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에서 예수가 하신 일을 많이 적는다. 비록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어도 바로 요한이 쓴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려고 여러 번 편집을 거쳤다. 이 기록이 만들어졌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었고, 허다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서기 101년에 유대인 동료 나단에게 기록을 부탁했고, 자기 기억과 다른 3복음을 참조하여, 나단이 적었다. 요한은 자신의 저서가 하나도 없었다. “요한 1서”라고 알려진 편지는 요한의 지도 하에 나단의 작품을 소개하는 편지로서, 요한 자신이 썼다.

121:8.11이 저자들은 모두 그들이 본 대로 기억한 대로, 또는 들은 대로, 바울의 기독교 신학을 나중에 옹호함으로, 그들의 개념이 영향을 받은 대로, 예수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렸다. 어설프기는 해도, 이 기록들은 거의 2천 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인정하는 말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적고 그의 행적을 다시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나는 행성에 있는 정보를 마음대로 이용하였다. 나의 주요한 동기는 지금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을 깨우칠 뿐 아니라, 앞날의 모든 세대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은 기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근원이 부족했을 때, 초인간 기록에 의존했다. 주의 일생과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와 참 중요성에 관하여 우리의 개념에 더 잘 맞도록 언어 표현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실제의 인간적 개념과 생각 방식을 고수하였다. 인간의 기록에서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을 수 없을 때, 중도자들의 기억 자료에 의존했다. 2차 근원의 정보가 부적당한 것이 드러났을 때, 서슴지 않고 나는 행성 바깥에서 가져온 정보에 의존했다.

사도 안드레의 기록에 담긴 기억은 별도로 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보석 같은 생각을 2천 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수집하였다. 계시 위원회는, 순전히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필요한 개념의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이 실패했다고 증언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 바깥 근원의 정보나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고 금하였다.


내 동료 중도자 11명과 함께 일하면서, 기록을 책임진 멜기세덱의 감독 하에서, 이 이야기를 엮었다. 효과적인 배열을 위해 내 생각의 선택에 따라 이 이야기를 엮었다. 나로 하여금 예수의 일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만드는 생각과 개념, 그리고 가장 뛰어나게 유익하고 널리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 표현을, 될 수 있으면 인간다운 생각과 개념을 나는 서슴지 않고 이용했다.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을 대신하여,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을 다시 진술함에, 이용된 모든 근원의 기록과 개념에 대하여 우리가 빚진 것을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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