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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 4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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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 4차 개정 합본 - 용어 통합


 

제 196 편
예수의 믿음


. 중도자 위원회
. 1935년



196:0.1 예수는 숭고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녔다. 그의 믿음은 그에게 깃든 조절자의 활동에서 생겨난 통찰력의 결과였다. 그의 믿음은 전통적이거나 단순히 지적 믿음이 아니었고, 온전히 개인적이고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었다.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하고 위대하다고 보았다. 그는 온통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집중하였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개념을 예수가 창시하지 않았지만, 모든 필사 인간이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함으로, 그 생각을 숭고한 체험으로 높이 들어올렸다.

예수는 죄 많은 세상에서 결사적으로 투쟁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매달리지 않았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모든 자연스러운 곤경과 이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여 최고로,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평안함을 맛보고, 하늘 아버지의 바로 그 계심 가운데서, 믿음으로 엄청난 생활의 기쁨을 느꼈다. 이 승리한 믿음은 실제로 영적으로 얻은 생생한 체험이었다. 나사렛 예수의 인간 체험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생생한 실체가 된 적이 없었다.

지역 우주의 이 세계와 어느 다른 세계에서도 유란시아에서 사신 주의 일생에서 새로운 상급의 종교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영적 관계를 가지는 데 기초를 두고, 진정한 개인적 체험을 거친 최고의 권한으로 온전히 인정받은 종교이다.

신학은 믿음을 고정시키고, 공식화하고, 정의하고, 교리로 만들지 모르지만, 예수의 믿음은 개인적이고, 살아 있고, 유일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순전한 영적 믿음이었다. 예수는 인생의 벅찬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에 의심하지 않고 충성함을 어김없이 보였다. 더할 나위 없는 이 믿음은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잔인하고 으스스한 위협에도 겁내지 않았다.

196:0.6 종교적 천재의 경우에, 강한 영적 믿음은 강한 자부심으로 인해 비참한 광신으로 이끄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하나님과 친히 겪는 체험의 표현, 온전히 무의식이자 저절로 일어나는 혼의 표현이었다.

모든 것을 헌신하면서 꺽이지 않는 예수의 영적 믿음은 결코 광신이 되지 않았고, 보통의 삶 속에서 조화되는 가치에 대하여 공정한 지적 판단을 부인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사람의 아들은 눈부시게 조화된 성격이었다. 인간답고 신성한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서, 훌륭하게 조율되었다. 개인적 믿음, 영적 희망, 도덕적 헌신은 언제나 비할 데 없이 종교적으로 통일되어 서로 관련되었다.

예수의 믿음은 모든 영적 가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견된다고 상상했고, 따라서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하였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처럼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뜻을 구성한다고 상상했기 때문에, 열심으로 이를 실현하는 운동에 몸을 바쳤다. 하지만 그의 일생 전체를 통해서, 광신자의 격분이나 자기 본위 종교인의 피상적 천박성이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주의 일생 전부가 이 살아 있는 믿음,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한결같이 조절되었다. 이 영적 태도가 완전히 그의 생각과 느낌, 믿음과 기도, 가르침과 설교를 지배했다. 신과 가까운 관계를 의식했어도, 누가 그를 "선한 선생"이라 일컬었을 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는가?” 하고 순간에 대답한 것은 자아를 잊어버리는 그의 태도는 어떻게 우주의 아버지가 자신을 그에게 충만히 나타내고, 그를 통해서 자신을 그 영역의 필사자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는지 우리는 비로소 이해한다.

예수는 언제나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견지에서 종교를 풀이했다. 기도나 종교 생활에서 어떤 다른 모습에 관하여 주의 생애를 연구할 때,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했는가 보라. 그에게 기도는 영적 태도의 성실한 표현이요, 혼의 충성 선언, 개인적 헌신의 낭독, 감사의 표시였다. 총명한 기도와 성실한 예배로-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함으로―그 비결을 얻었다.

196:0.11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에서 종교는 생생한 체험, 즉 직접 행하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땅에 있는 부모에게 기대듯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였고, 뜨거운 믿음은 확실히 하늘 아버지의 보살핌을 한 순간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의심이나 회의에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전혀 두려움 없는 그러한 신뢰의 높이까지 다다랐다.

그의 종교적 체험에는 망설이는 겉치레가 전혀 없었다. 성장한 어른의 이 위대한 지능 속에서 어린아이의 믿음이 종교적 의식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최고로 다스렸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 너희는 결코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한다”하고 한때 말한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믿음이 어린아이 같기는 했어도,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를 믿으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보장을 믿으라고 요구한다. 예수는 대단히 감동스럽게 추종자들을 자극했다. 이것이 “나를 따르라”하는 한 가지 최상의 요구 조건의 온전한 의미이다.

땅에서 예수의 일생은 한 가지 큰 목적에 바쳤다―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종교적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는 건전하고 당당한 결정을 내리고, 다양한 실망을 용감히 겪고, 특별한 어려움을 굳게 이겨냈으며, 의무의 엄격한 요구 조건을 주춤하지 않고 따랐다. 예수가 믿은 것을 믿고 그가 믿은 것처럼 믿는 데는 힘찬 의지와 확고한 확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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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예수

196:1.1 아버지의 뜻에 그리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바친 예수의 열정은 사람의 결심과 인간적 결의보다 더한 것이었다. 미가엘이 지역우주 군주라는 대단한 사실과 상관 없이, 사람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주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하늘로 올라갔다. 주는 사람들에게 속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속한다. 그리스도가 인간인가 신인가 토론하면서 나사렛 예수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한 종교적 인간이었다는 예외적 진리를 놓치지 말라. 그는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살았던 가운데 참으로 가장 종교적 인간이었다.

이 계시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 신학의 무덤으로부터 회복되고, 그 이름을 지니는 교회와 모든 다른 종교에게 살아 있는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 수고가 될 것인가! 갈릴리의 예수가 필사 인간의 지성과 혼 속에서 개인적 종교 생활의 이상으로서 다시 자리를 찾는다면, 제도화된 기독교는 교회 권한이 전복될까 두려운가가? 예수의 살아 있는 종교가 예수에 관한 신학적 종교를 갈아치운다면, 기독교 문명에서 일어날 사회적 재조정, 경제적 변화, 도덕의 회복, 종교적 수정은 철저하고 혁신이 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의 종교적 믿음을 함께 가지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한 주의 일생의 그 영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가 무엇을 믿었는가 찾아내고, 그 이상을 발견하며, 그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을 아는 것이다.

서민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기쁘게 들은 것은 그가 그들 가운데 하나요, 꾸밈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정말로 보통 사람이었다.

예수의 일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함께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한 것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은 것 같이 사람들을 믿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그는 사람들이 형제인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196:1.6 예수는 사람의 성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의식하는 데까지 올라갔다. 믿음과 깃드는 조절자의 행위가 함께 성취하여, 인성에서 신성에 이르기까지 올라갔다. 점진적으로 자아를 각성하는 이 여러 단계는 다음의 특별한 여러 사건으로 구별된다:

1. 생각 조절자의 도착.
2.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났던 임마누엘의 메신저.
3. 세례에 뒤따른 여러 표시.
4. 변모산에서 겪은 체험.
5. 모론시아 부활.
6. 영으로서 승천.
7.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이것은 그의 우주의 무제한 통치권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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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종교

196:2.1 너희는 예수에 관한 종교를 전파해도 좋지만, 예수의 종교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오순절의 열심에 빠져, 베드로는 뜻하지 않게 새 종교,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종교를 창시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새 복음을 기독교로 변화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 견해를 담고 다마스커스 길에서 그가 예수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을 그리는 종교였다. 하늘나라 복음은 갈릴리의 예수가 직접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으며, 기독교는 거의 순전히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 예수의 종교 체험을 기록한 것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특정 부분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눈에 띄는 기록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이다. 신약은 훌륭한 기독교 문헌이지만, 예수다운 모습이 빈약할 따름이다.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은 원시적 경외감과 인간적 존경이 나타나는 초기의 관념으로부터, 몸소 영적 교통을 가지는 여러 해를 거쳐서, 마침내 그가 아버지와 하나임을 의식하는 높은 상급 지위에 이를 때까지 종교적 성장을 묘사한다. 인간인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점진적으로 올라간 것은 순전히 필사 인간의 성취였다.

마가ㆍ마태ㆍ누가는 신성한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는 숭고한 투쟁에 몰두한 인간 예수의 그림을 얼마큼 간직한다. 요한은 신성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땅에서 걸어다닌 승리한 예수의 그림을 제시한다. 주의 일생을 연구한 자들이 저지른 큰 잘못은, 더러가 그를 전적으로 인간이라 생각했고 더러는 오직 신이라 생각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시피, 예수는 참으로 인간이자 신이었다.

바울의 기독교는 사람들이 신적인 예수를 경배하도록 만들었지만, 투쟁하는 인간 예수를 못보고 지나쳤다. 인간 예수는 개인의 종교적 믿음의 용기와 그에 깃드는 조절자의 영웅다운 행위로 인하여, 낮은 인간 수준에서 신과 하나가 되기까지 올라갔으며, 이처럼 모든 필사자가 그렇게 인간으로부터 신성에 이르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러한 새 생명의 길이 되었다.

신약의 저자들은 부활한 예수의 신성을 믿었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즉시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인간다운 주의 모습을 기록에서 빼버리는 경향을 부추겼다. 기독교 운동 전체가 나사렛 예수의 인간다운 그림으로부터 멀리, 부활한 그리스도, 영화롭게 돌아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였다.

196:2.6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 형제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몸소 체험한 종교를 세웠다. 바울은 영화롭게 된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되고, 그 형제 단체가 신다운 그리스도를 믿는 동료 신자들로 이루어진 그러한 종교를 세웠다. 예수의 자신 수여에서 이 두 개념은 신이자 인간인 일생에 잠재했다. 두 성품을 적절히 인정하는 통합된 종교를 추종자들이 만들지 못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몸을 바친, 온통 거룩하게 헌신한 필사자였다. 그의 선언 가운데 많은 것은 모든 추종자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부과한 요구를 고백한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가난한 자를 축복한 것은 그들이 보통 성실하고 경건했기 때문이다. 부유한 자가 보통 바람을 피우고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가 없는 빈민을 비난하고, 거룩하게 헌신하는 경건한 부자를 칭찬할 것이다.

예수는 세상에서 사람이 마음을 편안히 가지도록 이끌었다.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인류에 대하여 비관적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주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았고, 살아남기를 택한 자에게 장대하고 영원한 앞날이 있음을 미리 알았다. 모든 사람이 사악하기보다 약하다고, 타락하기보다 갈팡질팡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가 어떻든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형제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라고 가르쳤다. 그의 종교에서 황금률을 필수 요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유한자의 무한한 가치였다. 어떤 필사자가 예수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서 격려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196:2.11 예수는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규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종교에 관한 것이었고,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체험이다. 사회가 성취할 가장 높은 궁극의 목적은 결코 사람들이 형제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뛰어넘기를 바랄 수 없고, 이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인식에 기초를 둔다. 사회가 성취할 모든 이상은 오직 이 신성한 나라가 올 때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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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의 우위성

196:3.1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효과 있게 분류하고 평가하고 조정한다. 종교는 인간의 걱정거리를 없애지 않지만, 이를 분해하여 해결할 안목을 준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의 모든 요구 조건에 효과적으로 순응하기 위하여 성격을 통합한다. 종교적 믿음은 깃드는 신의 계심이 분명히 이끄는 것, 우주의 첫째 근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수의 복음에서 그분은 하늘 아버지요, 인간을 구원하는,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다.

우주 실체에는 꼭 세 가지 원소가 있으니, 사실(fact)ㆍ관념(idea)ㆍ관계(relation)이다. 종교적 의식은 이 실체들을 과학ㆍ철학ㆍ진리로서 식별한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사물ㆍ의미ㆍ가치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실체를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과 대등하다.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 실체와 동일함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 완성―자아 전체, 자아 총체―의 체험과 맞먹는다. 총 실체의 체험은 하나님을 충만히 깨닫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최종 체험이다.

인생의 총합은 사람이 사실에 의해 교육받고, 지혜로 고귀하게 되며, 종교적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리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에 있고, 도덕적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영적 확실성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의 진실함에 있다.

196:3.6 지성이 전적으로 물질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지성은 높은 수준의 영적 통찰력과 그에 상당하는 신성한 가치 분야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의 지성 속에 조절자가 있다. 인간의 지성에 이 영이 깃든다는 세 가지 증거가 따로 있다:

1. 인도주의적 교제―사랑. 순전한 동물 지성은 자아를 보호하려고 함께 살 수 있지만, 오직 영이 깃든 지능이 사심 없이 이타적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성질이 있다.

2. 우주의 해석―지혜. 영이 깃든 지성만이 우주가 개인에게 친절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3. 인생의 영적 평가―예배. 영이 깃든 사람만이 신의 계심을 깨닫고, 신성을 미리 맛보는 가운데, 그와 함께 더욱 충만한 체험을 얻기를 추구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은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지 않으며, 인간의 체험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을 낳지 않는다. 통찰력, 곧 도덕적 가치를 인식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인간의 지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발견ㆍ인식ㆍ해석, 그리고 선택밖에 없다.

196:3.11 우주의 도덕적 가치는 필사 지성이 세 가지 기본적 판단을 내림으로, 곧 선택함으로, 지적 소유물이 된다:

1. 자아의 판단―도덕적 선택.
2. 사회적 판단―윤리적 선택.
3. 하나님에 대한 판단―종교적 선택.

따라서 인간의 모든 진보는 계시와 진화의 공동 기법으로 실현되는 듯하다.

196:3.16 사랑을 주는 신성한 분이 사람 속에 살지 않으면, 사람은 사심 없이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해석하는 이가 지성 속에 살지 않으면, 우주의 통일성을 참으로 깨달을 수 없다. 평가하는 자가 사람과 함께 거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를 평가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사랑하는 자는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온다. 이 해석자는 우주의 통일의 일부이며, 이 평가자는 신성하고 영원한 실체에 담긴 모든 절대 가치 중심 근원의 자식이다.

종교적 의미를―영적 통찰력―가진 도덕적 평가는 선과 악, 진실과 잘못,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개인이 선택함을 가리킨다.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대체로 이 영적 가치 분류자가 골라놓은 가치를 인간의 의지가 선택하는가에 달려 있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두 단계로, 지성으로 발견하는 단계, 깃드는 신다운 영이 계시하는 단계이다.

신이 깃드는 심오한 체험을 깨닫는 것은 유물론 기법을 초월한다. 너희는 영적 기쁨을 현미경 밑에 놓을 수 없고, 사랑을 저울에 달 수 없고, 도덕적 가치를 자로 잴 수 없다. 영적 예배의 질(質)을 수치로 어림잡을 수도 없다.

히브리인은 도덕적 종교를 가졌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을 찬양하였으며, 바울과 그 후계자들은 믿음ㆍ소망ㆍ자선의 종교를 창시했다. 예수는 사랑의 종교,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보장과 함께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종교를 본보기로 보였다.

깊이 생각하여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람은 즉시 혼에 새로이 신이 쳐들어오는 것을 체험한다. 도덕적 선택은 안에서 반응하는 동기로서 종교가 된다. 그러한 진정한 종교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이 아니다. 그런 종교는 객관적 총체―우주와 그 창조주―에 대하여 의미 깊게, 총명하게 반응하는 개인의 주관성 전체를 의미한다.

196:3.21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답고 초월적인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심령적인 환상이 아니다.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지켜보기에 순전히 주관적 현상으로서 작용하는 듯이 보인다. 사람이 가장 높은 객관적 실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은 오직 그를 알고 경배하고 그의 아들임을 깨닫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참된 종교적 예배는 신성하게 실재하는 것, 실체의 바로 그 근원인 것과 몸소 교제하는 것이다. 사람은 예배로 인하여 더 나아질 생각을 품고, 그렇게 함으로 궁극에는 최선에 이른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이상으로 삼고 시도된 봉사는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영적 실체를―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 의식은 깃드는 영 안에 거한다. 사람이 만든 많은 종교적 체계는 인간 지능이 빚은 것으로부터 생겨나지만, 하나님 의식이 반드시, 괴상한 이 종교적 노예 체계의 일부는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상주의의 발명이 아니다. 모든 초자연적 통찰과 가치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개념을 통일하려고 지어낸 가설이 아니다. 그는 사랑의 성격자이며, 그로부터 이 모든 우주 명시가 파생된다. 사람의 세계에 있는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필사자 체험의 영적 성향이 높아짐으로 통일되며,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성격의 영적 체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도덕적 성품은 동물을 뛰어넘지만 영 밑에 있다. 도덕성은 의무를 인식하는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존재함을 깨닫는 것과 같다. 성격이 달성하는 물질 분야와 영적 분야 사이에 상물질이 작용하는 것 같이, 도덕의 구역은 동물 지성과 인간 종류의 지성 사이에 끼어 있다.

196:3.26 진보하는 지성은 법칙ㆍ도덕률ㆍ윤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수여된 영, 깃드는 조절자는 진화하는 인간에게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아버지 근원이신 법률가를 계시한다. 그렇게 빛을 받은 사람은 종교를 소유하며, 하나님을 찾으려는 길고 모험이 가득한 탐구를 위한 영적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도덕성은 반드시 영적인 것이 아니지만, 전적으로 인간다울 수 있다. 참된 종교는 모든 도덕적 가치를 높이고 더욱 뜻있게 만든다. 종교가 없는 도덕은 궁극의 선을 드러내지 못하며, 또한 그 자체의 도덕적 가치조차 살아남지 못하게 한다. 종교는 도덕이 인식하고 승인하는 모든 것을 강화하고 영화롭게 만들고, 확실히 살아남게 만든다.

종교는 과학ㆍ예술ㆍ철학ㆍ윤리ㆍ도덕률 위에 서 있지만, 이로부터 독립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인간의 체험 속에 떼어낼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신학은 언어의 한계로 인해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적절히 묘사할 수 없다.

종교적 통찰력은 패배한 사람에게 더 높은 소망과 새 결심을 가지게 하는 힘을 소유한다. 사랑은 사람이 우주에서 올라가면서 이용해도 좋은 가장 높은 동기이다. 그러나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빠져 버린 사랑은 속임수일 뿐이다. 사랑은 반드시 상물질 및 영으로 진보하는 연속된 수준에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예술은 상물질 수준을 향하는 손짓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질 우주에서 수수께끼로 보이는 것을 풀려는 노력이다. 철학은 사람이 인간의 체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의 최고의 손짓이요, 최종의 실체를 향하여 장엄하게 손을 뻗는 것,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는 결심이다.

196:3.31 종교적 체험 분야에서, 영적 가능성은 잠재하는 현실이다. 앞을 향한 사람의 영적 욕구는 심리적 환상이 아니다. 사람이 우주에서 꿈꾸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지 모르지만,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진리이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해야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환경을 뛰어넘고, 이 방법으로 이 신성한 사랑을 보는 통찰력을 통해서, 현재 물질 세계의 한계를 벗어난다. 사람의 혼 속에서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만든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찾아낼 때, 사람은 이를 실천하고, 정의를 실행하려는 소망으로 불탄다.

낙심하지 말 것은, 인간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고, 예수 안에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는 계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이 당면한 큰 도전은 인간의 지성 안에 거하는 신성한 훈계자와 의사 소통을 개선하는 것이다. 사람이 겪는 가장 큰 모험은 영 의식의 경계지에 이르려고―신성한 계심과 접촉하려고―마음을 다하여 노력을 기울이면서, 혼 의식이 태어나는 어둑한 영역을 거쳐서, 자의식 테두리를 확장하려고 전심으로 노력하는 데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 의식이요, 하나님을 이해하는 종교적 체험을 힘차게 확인하는 체험이다. 그러한 영 의식은 하나님과 아들 관계의 사실을 아는 것과 동등하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를 우주와 함께, 우주의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실체와 통합되는 것과 대등하다. 오직 영적 알맹이만 썩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남기를 택하지 않더라도 뒤에 남는 조절자는 사랑으로 태어나고 봉사하면서 양육된 그 실체들을 보존한다. 이 모두가 우주의 아버지의 일부이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사랑이요, 아버지의 이 생명은 그 아들들 안에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은 아들들의 아들―필사 인간―안에 계신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버지 관념은 여전히 인간의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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