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이트는 유란시아 한국 독자회 지정 카페(http://cafe.daum.net/urantiakorea)의 Q&A 게시판 과 함께 합니다.

또한 유란시아서에 대한 질문이 있으시면 카페 게시판에 올리시거나

편집자에게 보내주시면 재단본 번역자께서 답변을 해주실 것입니다.

 

 

Q17. 유란시아서를 아는 것과 하늘 아버지는 아것 과는 어떤 차이가 있고 진정 하늘 아버지를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Q16. 변호와 상물질 성전

Q15.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

Q14. 요한의 보상

Q13. 유란시아서를 우리에게 준 이유

Q12. 내려오는 필사자는 왜 내려 오는가?

Q11. 평범하게 산 사람, 유란시아서를 읽고 믿은 사람, 수십번 읽어 통달한 사람, 기본 개념만 알고 유란시아서를 전하는 데 기여한 사람에게 하늘에서 대우가 어떻게 다른가?

Q10. 사람이 부활할 때 재생할 가치가 있는 것만 재생한다는데 그 구체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Q9. 종교는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가?

Q8. 영적 성숙 7단계

Q7. 요한계시록
Q6. 영과 진리로....
Q5. 미가엘의 일곱 번 수여에 관련하여...
Q4. 부활
Q3.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 (a confession of supreme devotion) 과
      거룩한 헌신을 확인하는 것 (the validation of consecration)의 차이점

Q2.상물질 상지혜 27번항 질문 (유란시아서 p.557)

Q1. 삼위일체에 관한 Trinity, Triodity, Triunity 에 대해서

Q17. 유란시아서와 하늘아버지를 아는 것

(질문) 존경하는 박사님

어떤 목사가 죽으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어떤 유란시아 독자가 나는 유책은 알아도 하늘 아버지는 모른다 라고 하는 말을 저는 들었습니다. 유란시아서를 아는 것과 하늘 아버지는 아것 과는 어떤 차이가 있고 진정 하늘 아버지를 아는 방법은 무엇인지 정리를 해주십시요

<답변>

하늘 아버지를 아는 방법

사람이 아무리 거짓말이 능숙하다 하더라도 믿지 않는 하나님을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마음 속에 믿음이 없으면 그러한 말에는 자연히 열심이 없고 김이 빠지게 마련입니다. 정말로 믿지 않으면 그것이 행동에서 나타나니까 듣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속아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차리지요.

유란시아서를 잘 읽었으면, 적어도 머리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조금 알 터이고, 1부의 철학적 내용이 어렵다면, 적어도 4부를 읽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같은 분이라고 했으니까요. 하나님 아버지를 모른다면, 유란시아서를 겉핥기 식으로 또는 흥미 위주로 읽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읽었으니, 내용을 모르는 것이지요.

1855페이지 3째 문단에 아들을 아는 자는 또한 그 아버지, 즉 하나님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알려면 그가 어떠한 일생을 살았는가 4부를 잘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성격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격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고 또 다른 무한한 비성격 존재들을 상대하는 비성격의 속성도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개념에 관심이 있으면, 1부를 읽으면 조금 도움이 되겠지만,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이해하려는 것은 욕심이고 수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런 것을 읽고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하나님의 개념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만심일 뿐, 하늘 가는 데는 전혀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자만심은 실천의 소홀로 이끌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머리 속에는 한정된 세포가 있고, 각 세포가 한 가지 개념을 담는다고 해도, 짧은 인생 동안에 그 머리가 소화할 수 있는 개념은 여전히 한정되어있지요. 그것을 아무리 늘여서 하나님의 무한한 키와 대보려 해 보았자, 키가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만나려면 예수님의 일생을 잘 읽고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국에 넣지 않은 부뚜막의 소금처럼, 전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도 부뚜막의 소금과 마찬가지지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다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중에 얼마는 하늘에 가고 나머지는 못 갈지 모릅니다. 비관적으로 들리지 모르지만, 좁은 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 문에 들어갈 확률이 반 이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물론 이러한 내 생각이 틀릴지도 모르고, 차라리 틀렸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사람들 중에 더러는 하늘에 가고 나머지는 못가겠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얼마는 미끄러지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함께 밥도 먹은 적이 있지 않느냐고 밖에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은 못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안면이 있는 정도로는 못가겠지요. 예수와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해도 저택세계에 가는가?

교회/성당/유대인 회당 또는 모슬렘 회당, 또 절에 가든 안 가든 저택 세계에 가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이순신 같은 사람은 교회를 다지지 않았어도, 글자 그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니, 아마 저택세계에 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 조절자가 각 사람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하나님을 가르칩니다.

어느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아시겠지요. 그 사람이 입으로 무슨 말을 해도, 하나님을 무슨 이름으로 불러도 (하느님, 알라, 야웨, 천부, 엘로힘 등),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마다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 자세히 물어보면, 각자가 다 다른 모양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람 교도들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기지요. 대부분은 자기들은 종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들 중의 일부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상을 준다고 착각하고, 자기들과 다르게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나 미국 사람들에게 폭탄을 던져서 함께 죽으면, 천국에 직통으로 간다고 믿고 그런 일을 합니다.

구약을 믿는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이 사람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요 (anthromorphic God, 사람같은 하나님). 그래서 구약을 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 영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주 실수하고 또 뉘우치며, 걸핏하면 조그만 일에 화를 내고 많은 사람을 홍수로 쓸어버리거나 불에 태워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잔인한 하나님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믿게 만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잘 못 그렸습니다.


< morning at Antibes, Monet. 아침은 하루를 더 살라고 주는 하나님의 선물!>

그러한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보여 주려고 예수님이 오셨지요. 물론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저택세계에 갑니다. 제대로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면 알겠지요. 잘 믿으면 이웃을 사랑하여 좋은 열매가 열리고, 잘못 믿으면 나쁜 열매가 열려서 이웃을 해치며, 또한 믿음이 없으면 아예 아무 일도 하지 않지요. 믿는다고 말만 하고 그 믿는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저택세계에 못가겠지요.

필요할 때나 어려울 때 도와 달라고 단추를 누르면 금방 와서 도와주는 하나님, 그 외에는 무시하고 잊어버려도 좋은 그런 심부름꾼 정도의 하나님, 하나님을 소원을 들어주는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마술사처럼 믿는 사람은 믿기는 해도 잘못 믿고 있으니, 나중에 크게 실망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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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6. 변호와 상물질 성전

언제 변호할 기회가 있을까?

수호 천사들은 3급이상의 필사자는 개별적으로 보살피고, 4급이하 7급 이상은 집단으로 필사자를 보살핀다고 합니다. 무급 (또는 7급 미만)의 경우에는 조절자는 배당받아도, 거의 동물과 마찬가지이니까, 수호 천사를 배당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1233 페이지에 보면, 필사자의 뜻으로나 행동이 살아남기를 택한 것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은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의심이나 변론의 여지가 있다면, 아마도 무급과 7급 (또는 그 이상)을 오르락 내리락 하던 사람이겠지요. 그래서 우주 정부에서도 그 사람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경우 있는가 봅니다. 이런 경우에는 임시 자격으로 살아남도록 판정을 내리고, 저택세계에 보내는데, 계속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지켜본다고 합니다. 그러니 임시 자격으로 살아남았을 때, 요새 말로 임시 비자를 받았을 때, 마태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선지자 노릇했고, 병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지 않았나이까?” 하고 한번 변명해 볼 기회가 있겠지요. 아마도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는 어렵겠지만, 다른 심사 위원들에게 변명해 봄직합니다.

살아남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단지 어떤 교리에 찬성하는가 또는 머리로 얼마나 아는가를 재는 필기시험에 합격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에 (길든 짧든) 믿은 진리를 실천했는가 하는 데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말로만 하는 것이니 그 정도의 속임수라면 천사의 눈에도 대번에 들통이 나겠지요, 저택 세계까지 임시자격으로 나가는 것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2. 상물질 성전

622 페이지에 보면, 이 상물질 성전은 빛과 생명의 시대가 올 때 땅에 내려온다고 합니다. 아직 요원한 미래의 이야기라 감이 잘 잡히지 않지만, 가능한 후보지는 이스라엘, 미국, 한국 등이 있겠지요. 유대인이 하나님 앞에 특별한 지위가 없고, 게다가 예수님을 거부한 경력이 있으므로, 아마도 이스라엘이 후보지가 될 가능성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높다고 보기가 어렵지요.

한국은 기독교 신자들이 지난 백년 사이에 많이 생기기는 했으나 뿌리가 좀 짧아서,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것같습니다. 유란시아서가 처음에 미국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영어로 씌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이 유력한 후보지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빛과 생명의 시대가 백년이나 그 이상 기다려야 한다면 한국도 만만치 않은 후보지라 생각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1미터 평방에 한 사람씩 앉힌다면, 성전의 크기가 가로 세로 1 킬로미터면 백만명을 앉히겠지요. 어디서 살든 하나님의 주신 복을 세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 좋은 이웃이 되고 땅에서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애쓰면 저택세계에서 부활할 자격을 얻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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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5.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

유박사님께서는 유책 1부에서 3부는 지식 위주로 제4부는 하늘로 가는 필사자에게 꼭 필요한 메세지 라는 말씀에 공감 합니다 .
왜 제 4부를 중점 학습을 해야 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를 해주십시요

어째서 예수님 편을 잘 공부해야 하는가?

4부가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땅에서 살면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즉 코앞에 닥친 모든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1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2부는 지역우주에서 어떤 하늘 존재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3부는 아담과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지구의 역사를 다루며, 이것을 읽으면 4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1, 2, 3부만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등한시하면, 첫번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니, 많은 하늘 지식이 소용없게 됩니다.

몇번 읽어야 되는가?

초창기에 시카고에서 포럼에 1924년경부터 모인 사람들이 대체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 우주 등에 대하여 알고 싶어한 내용에 대하여 대답한 글의 요약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그 책은 다 읽어야 하고, 여러번 읽어야 전체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책의 내용이 난해한 곳이 많이 있고, 영어 사전에도 없는 낱말들이 여럿 나오며,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책의 부피가 너무 커져서, 내용을 줄이라는 지침이 있었던 듯합니다. 따라서 글을 줄이고 어떤 대목은 여기 저기 잘라 버려서, 이야기가 연결이 안되는 곳도 있으니, 두세번 읽는다고 해도 겨우 감을 잡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은 인간에게 배울 것이 없다든가, 무한한 파라다이스 하나님 외에 유한한 하나님 (최상 존재)의 개념이라든가 하는 내용은 철학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니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부분을 좋아할 것입니다. 또한 천문학이라든가 미립자들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부분에 관심이 있을 터이고, 유전학이나 생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지구의 진화부분에 관하여 관심이 있겠지요. 물론 이 모두를 이해하면 좋겠지만, 4부가 제일 이해하기 쉽고, 읽고 실천을 제대로 하면 첫 관문은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4부를 읽음으로 당장 얻는 이익

우리가 하늘 가는 데 필요한 지식은 예수님 편에 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각자가 일생을 살면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할 터인데, 절대적으로 옳고 믿어도 좋고 조언을 구해도 좋은 그러한 완벽한 선생은 예수님 밖에 우리 주위에서 찾을 수 없지요.

예수님 편을 읽으면, 예수가 어떤 경우에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예수가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는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으니, 예수님이 내가 닥친 경우에 어떻게 일을 처리했을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러저러한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묻는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하는 것을 유추하려면, 4부를 여러번 읽고 소화해야 그 가르침을 저절로 실천하게 되겠지요. 예수님이 어느날 몇시에 누구를 만났다든가 하는 자세한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예수님이 어떤 경우에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적혀 있고, 그와 비슷한 경우에 어떻게 처신했을 것인가는 똘똘한 머리로 잘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자님이 하루 종일 명상해봐도 성현의 글을 읽고 배우느니만 못하다 하였다는데, 혼자의 머리로 혼자의 힘으로 올바르게 일생을 사는 것이 쉽지 않지요. 4부를 읽으면, 적어도 완전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고,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똑같이 살 수 없지만, 우리가 닥친 경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했을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잘못하는가?

(1) 첫째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2) 둘째로, 알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자기의 권력과 이익을 챙기고 싶은 마음 때문에, 또는 하나님의 일을 조금하면서 자기의 이익도 적당히 챙기려는 마음, 즉 두 가지를 다 갖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이 실천의 종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땅에 오기 전부터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았지만, 실천하는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예수님을 자기 보다 낮은 존재들에게 7번이나 함께 살면서 실천하는 경험을 쌓으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왜 그러한 삶을 살았는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괴상한 교리가 나왔고 가르침의 정신을 못보고 겉으로만 예수님을 흉내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쳐야 할 예 몇 가지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에서 기적 위주로 그리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신약을 기록 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많이 오해하고 잘 몰랐기 때문에, 지난 2천년 동안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해왔습니다.

카토릭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치며, 베드로가 결혼하고 그의 장모 이야기도 신약에 나오는데, 카토릭에서는 니케아 종교회의 때 (서기 325년), 사제는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으니, 이것은 몰라서이든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사제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던 듯합니다.

352년 라오디케아 (Laodicea Council) 회의 때, 여자를 사제가 되지 못하게 금하였고, 여성 차별이 시작되었으며, 나중에는 (385년) 교황이 되기 위하여, 살던 아내를 이혼하는 교황도 (Siricius) 있었지요.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가르쳤는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잘 몰랐으니, 그런 부당한 일을 저질렀고, 그런 사람들이 서양 교회를 지배하고 법을 만들었습니다.

여성 차별이 옳지 않다는 것은 예수님이 여자들을 어떻게 대우하였는가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어떤 교회에서는 아직도 여자들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고 사제의 자리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몰랐거나 이해하지 못했고, 알았다고 해도 아버지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의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하여 그릇된 일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4부를 읽으면, 개인이 영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가르침뿐 아니라, 집단으로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결혼 생활에 대하여

한 가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살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여 지침을 받을 때, 결혼은 해도 좋으나 자식을 낳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한 지역우주의 군주에게 사람의 아들로 태어날 때 지워준 제한이었고, 분명히 우리는 이 부분에 한해서만 그를 따르면 안 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1839페이지 4째 문단에 보면, (1) 예수님이 결혼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이루려 하는 것은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2)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공동 창조자가 되는 것이 아버지의 신성한 뜻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1) 1330 페이지 3째 문단에 이마누엘이 지침을 줄 때, 예수는 결혼생활을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자식을 낳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결혼 생활에 관심이 없었던 듯 하고, 아예 결혼을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2) 다른 사람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했습니다.

이 결혼 생활을 빼고, 우리는 어떤 문제에 닥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주저할 때, 우리 정신에 깃드는 조절자가 안내해 주는 대로 따르면 되고, 혹시 그 말씀이 귀에 잘 들리지 않으면, 예수님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했을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4부를 읽는 목적: 실천하는 체험이 필수

실은 여기서부터가 어렵지요. 우리는 동물로 태어난 이상, 동물적 욕구와 항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알아달라고 요구하는 자아의 외침에 시달리는데, 이러한 자아 인정 욕구를 버려야 신답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51 페이지).

세상에서 학자가 되는 사람은 인정받기 위하여 공부하고, 정치가가 되는 것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은 천만 장자에게 왜 돈을 계속 버는가 물어보니, 돈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땅에서 살던 경험과 그 기억 외에 아무런 물질적인 것도 하늘나라에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권하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는 길을 따르는 것보다는 자아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의 권력과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 즐거움 때문에, 이것을 버리기가 어렵지요. 그러니 알아도 실천하기가 힘들지요. 그래서 반 이상이 넓은 길로 간다고 합니다.

아예 하나님의 길을 저버리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인생의 재미를 싫컷 볼 터이지만, 세상 친구들의 안면을 익히는 정도로 하나님과 안면을 터놓고 교회/회당/성당을 다니면서 최소한으로 무엇을 하지 말하는 계명이나 지키면서 하늘에 가는 줄로 일생을 착각해오다가 마지막에 미끄러진다면, 억울하겠지요.

1577 페이지 7번째 문단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 없다고 합니다. 양다리를 걸치려는 뜻은 결국 하나님을 소홀히 하려는 뜻으로 볼 수 있고, 예수님은 한 번도 너희의 몸과 마음과 뜻을 반만 바쳐도, 아니 10 분의 1만 바쳐도 받아준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입으로 떠벌여도,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조금씩 챙기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고 이것을 버리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이브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따로 추진하다가 불멸의 자격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우주에 별이 얼마나 많고, 인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진화했고, 천사들이 무슨 일을 한다는 것등을 머리로 알고 사람들에게 그런 철학적 지식을 과시해도, 하늘나라에 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합니다. 천국은 지식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달려 있고, 믿음이 있으면 실천하게 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의 예

1925년에 독일 인구가 6천 5백만이었는데, 이 중에 신교 신자들이 4천만, 구교 신자들이 2천 1백만이었다고 합니다. 나치당이 6백만 유대인들을 학살했어도, 손가락으로 겨우 꼽을 수 있는 몇 사람을 빼고,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항의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소문이 난 독일 신학자들은 난해한 신학을 가르쳤고, 이것은 신도들에게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요. 예를 들자면, 독일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이익이 생기는 것 때문에 좋아하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티칸의 교황 파이우스 12세도 나치당의 처사를 묵인하고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발언을 삼갔다고 합니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 교회는 크게 지었어도, 교황조차 3급에 미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유대인들이 도와 달라고 아무리 탄원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 Giovanni Panini, 성 베드로 성당>

결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를 알고 싶은 사람은 4부를 읽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하는데, 그 사람들의 말은 대체로 맞을 것입니다. 3급 미만의 사람은 하나님 (조절자)의 말씀이 위기에 닥쳐서나, 일생에 겨우 몇번 들릴까 말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3급에 도달했다는 확신이 들거나 조절자의 말씀이 자주 귀에 들리지 않는다면 (기계로 녹음할 수 있도록 들린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전해오지 않으면),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읽어 보고, 자신의 경우에 어떻게 예수님이 충고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따라 산다면, 다시 말해서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살기로 했다면, 그런 사람은 이미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를 가진 것이고, 수호천사 한쌍을 배치받습니다. (1242 페이지, 4째 문단)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를 받으면, 하늘나라에 입문을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조절자가 마음을 놓고 다른 일을 보실 정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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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4. 요한의 보상

질문 1.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어려움에 직면 했을데 외면 하시면서 다음 세상에서 보상 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 보상은 무었입니까 ?
질문 2. 예수의 종교는 행동 이라는 말은 결국 전도 하라는 애기인데 안하면 천국 못간다는 애기인지 아니면 늦게 간다는 애기 인지
제가 어딘가 유책에서 읽은 대목이 있는데 성실한 사람 다 천국 간다는 글을 읽은 바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정리를 해 주시겠습니까?

<답변 내용>

요한의 처신

이것은 아주 좋은 질문, 그러나 대답하기가 아주 어려운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가 요한을 외면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버려두었습니다. 인간적, 물질적 견해를 가지고 잘못 생각하면 예수님이 의리가 없었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이 충분히 상을 받을 만한 일을 했고, 또 마땅히 그렇게 받도록 주선했지만, 그런 보상이 죽기 전에 있으리라 생각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겠지요.

그 보상은 앞으로 수십억 년 동안 하늘 가는 동안에 언제라도 받을 수 있지요, 이 짧은 인생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동안에 보상이 없었다고 해서 의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의 눈으로 영원의 견지에서 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수십번 왔더라면, 여러 사람들이 그런 예수를 만나서 처신한 사례가 있었을 터이고, 그런 이야기를 종합해서 요한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여 그런 식으로 처신을 결정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꼭 한번만 오셨고, 요한은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의논할 상대도 없었지요.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들이 배운 지식과 유란시아서의 지식을 총합하면, 요한이 더 낫게 처신하는 방법이 있었을까 생각해 봅시다. 요한은 타고난 성향인지 리더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적도 없고, 예수님도 요한에게 제자가 되라고 힌트를 준 적도 없었지요. 다른 제자들을 뽑을 때는 나를 따르라 하고 말했지만, 요한이나 자기 동생들에게는 따르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기 일, 즉 예수님이 갈 길을 예비하는 일을 충분히 했지요. 십만 명이 넘게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주목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수제자 들 중에서, 안드레와 베드로, 또 아브너가 예수를 따르는 것을 좋다고 하고 보냈습니다. 요한이 자기 일을 걷어 치우고 혹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지만, 그를 따르는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 그렇게 하도록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이 서기26년 6월에 감옥에 갇혀서, 28년 1월에 죽었고, 예수님은 서기 30년 4월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니, 2년 3개월 정도 더 살았지요. 만약에 요한이 감옥에 갇히지 않고 계속하여 세례를 주고 활동했더라면, 예수님의 활동에 많이 지장이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요한과 예수 사이에 누구를 따를 것인가 주춤하고, 그 제자들 사이에 싸움이 있었겠지요. 요한의 제자들 중에 더러는 예수의 제자들의 적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어쨋든 요한은 이 세계의 무대에서 할일이 끝났고, 그가 나서야 할 막이 끝났고, 요한도 그런 것을 알았지요. (1506 페이지, 3째 문단) 허전했지만, 자기 의무가 끝난 것을 알았고, 무대를 예수님에게 비켜 주어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길을 떠났지요. 보통 사람은 이렇게 하기가 힘듭니다. 은혜를 모른다는 둥 비난을 하지도 않고, 예수를 비난하는 제자를 야단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요한이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될까 묻자, 예수님은 아버지가 인도하시리라고 언질을 주었습니다. (1506 페이지, 2째 문단).

예수님도 요한을 구하는 것이 어떨가 생각해 보았지만, 땅에서 요한의 일이 끝났고, 요한을 위해서 큰 일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예수님은 간섭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일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도록 자신을 자제했다고 합니다. (1507 페이지, 2째 문단) 하나님의 뜻대로 자연스럽게 그가 갇히고 무대에서 비켜난 뒤에도, 예수님과 요한의 두 제자 집단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소지가 많았는데, 이를 방지하시느라고 많이 애썼지요.


<Dieric Bouts, “Ecce Agnus Dei,” (하나님의 양을 보라) 유란시아서에는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를 보라” >

지금 요한은 예루셈 체계 본부에서 24 상담자 (장로) 들 중에, 아담과 이브와 모세를 비롯하여, 1 2 3 첫째 1차 중도자와 함께 유란시아 정부를 위해서 일하고 있고, 이 상태는 앞으로 삼위일체 아들 교육자가 오든지 아니면 빛과 생명의 시대가 올 때까지, 승천하는 과정을 임시 벗어나서, 당분간 지구에 남아 유란시아의 일을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요. 사타니아 체계 (사람들이 사는 1000 혹성들의 집합)의 수도 예루셈의 16장로들이 모두 유란시아 출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이 유란시아를 중요시 여기는가를 보여 줍니다. (나머지 8자리는 임시직입니다)


누가 하늘나라에 가는가?

1780 페이지 5째 문단에서 사람이 종교를 믿으면 반드시 그 종교를 전도하게 되고, 전도하지 않으면 입으로는 믿는다고 해도 실제로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시간도 돈도 마음도 전도하는 데 쓰지 않는다면, 결국은 거짓말인 것이 드러납니다. 정말로 믿으면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하여 전도하게 되지요. 그러니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전도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게라사에서 하신 설교에는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 적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다고 하셨으니,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예수님 때에 반이 훨씬 안되었던 듯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확률이 크게 늘어난 것 같지는 않게 보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뒤에는 목숨을 걸고 전도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사람들을 보기가 드무니, 확률이 그때보다 높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문이 좁다고 해서 진심으로 구하는 사람을 다 받아들이기에 넉넉하다고 했고, 예수님 스스로가 그 문이라고 했으니, 물론 성실하게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겠지요. 열심히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성실하지 않다고 볼 수가 있고, 입으로만 믿는 사람을 진심으로 믿는다고 할 수가 없는 듯합니다. 성실한 사람은 물질적 목적을 위해서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겠지요.

1829 페이지 첫째 문단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 거리에서 가르치지 아니하였나이까?” (즉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사옵나이다. 그러니 우리도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말했을 때, 너희는 같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일꾼이 아니었다, “나는 너희를 모르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찬성하는 정도로는 천국에 못간다는 뜻인 듯합니다. 교회의 문턱을 들락 날락하고 예식을 따르거나 교리에 찬성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뜻인 듯합니다.

같은 페이지에 “구원은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값을 기꺼이 치르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대체로 자기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께 부스러기를 드리고, 그 정신과 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고, 실질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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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3. 유란시아서를 우리에게 준 이유

성경에는 구원을 미끼로 교회를 세울 것이며 종교 생활을 하도록 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란시아를 준 목적은 인간의 영적 수요에 대한 우주의 단순한 반응인지 아니면 새로운 사회나 종교 단체설립을 원하는지 그런데 유 진리를 전파 하라면서 단체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가 없는 것은 왜 그런지 그리고 헌금이나 기부등 뚜렸한 설명을 하는 대목이 없는 이유 등 알송 달송한 부분이 많습니다

<답변 내용>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우두머리가 되어 베드로와 요한의 도움을 받아서 세웠으나, 교인들이 처음에는 종말이 올까 싶어 돈을 많이 냈지만, 나중에는 일하지 않고 그냥 얻어 먹는 사람이 늘어나서 결국은 재정이 바닥이 났고, 기근이 들고 박해도 심하고 해서 결국은 예루살렘이 망하기도 전에 문을 닫았습니다. (이것도 중앙 집권적 조직이었고, 돈 내는 신도들이 자꾸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베드로의 축복을 받아서 전도를 시작했고, 유대인보다는 그리스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도하고 교회를 많이 세웠지요. 바울은 서기 10년에 태어났고, 베드로와 처음에는 다투다가, 나중에는 따로 일했습니다. 죽기 전에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67년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고 바울은 로마 시민이라서 목이 잘리는 형으로 죽었습니다.


<마메르틴 감옥, 여기서 67년에 베드로와 바울이 죽는다>


<감옥의 이곳 샘에서 물이 기적으로 솟아 났다고 하고, 여기서 바울과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두 사도가 협심하여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 아직도 이 감옥의 지하실에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세울 때에는 지금 카토릭 및 기타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중앙집권화된 교회를 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세운 교회들에 대하여 편지를 썼고, 이 글들이 남아서 신약의 60%를 차지합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첫 300년 동안에는 알렉산드리아가 기독교의 중심이었고, 거기서 아다나시우스와 같은 뛰어난 신학자들이 다 나왔지요. 아다나시우스는 아다나시우스 신경을 썼고, 그것을 토대로 작성한 사도신경을 요즘 교회에서 사용합니다. 서기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가 있고 난 뒤에, 콘스탄틴 대제가 50 교회를 세우는 등 큰 힘을 쓰게 되자, 400 년 경부터 로마의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우월권(supremacy)을 주장하게 되고, 그 후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다음부터 (1095년 Clarmont 종교회의 이후) 차츰차츰 다른 교회들에 대하여 우두머리 노릇을 주장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콘스탄틴 대제, 유지들에게 이 금화를 나누어 주었다.>

물론 유란시아서를 보면 그러한 중앙집권적 조직은 예수님의 인가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요. 예수님은 항상 개인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표하는 분이고, 사람들이 만든 조직에 대하여 이리하라 저리하라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 길을 걷는 교회나 다른 조직은 그렇게 하는 한, 하늘의 지지를 받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물론 중앙집권적 조직이라 여러가지 폐단이 많았었지요.

임마누엘이 미가엘이 떠나기 전에 준 (1330 페이지) 다섯째 조언은 조직화된 종파를 공식으로 만들지 말라, 다시 말해서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교회 조직을 따로 만드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 중앙 집권화된 공식 조직을 만들면 그에 대항하는 조직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고 말씀을 전파하고 빛을 전하기 보다 저항으로 열 (분란) 이 더 많이 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조직하는 데 실패했지만, 바울은 이방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조직은 필요한데, 중앙집권화된 조직은 안된다면, 어떤 조직이 필요한가? 무엇이 이상적인 조직인가?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앙 집권화된 조직의 가장 큰 폐단은 권력 싸움이고, 평신도가 낸 돈과 물질로 교회 자체 내에서 사제들이 권력 투쟁을 하게 되고, 이것은 지난 2천년 역사가 잘 보여 줍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했어도, 신교의 교회들도 마찬가지로 중앙 집권적 조직을 만들었으니 피장파장입니다.

조직이 필요하다면 예수님은 어떤 조직을 원하시는가?

왜 좋은 조직이 필요한가를 먼저 설명하려 합니다. 건전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듯이, 조직의 구조가 좋아야 거기에 담겨서 일하는 사람들이 건전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구조가 나쁘면, 아무리 좋은 의도로 사람들이 그 속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해도, 나중에는 순수하게 일하기보다 자연히 권력을 더 잡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조직이 망쳐집니다. 이것은 지난 2천년 동안의 교회 역사가 잘 보여줍니다.

또한 구조가 좋아도, 의도가 나쁜 사람들이 들어가 일하면, 조직을 권력 지향적으로 바꾸어 버리겠지요. 그러나 우선 구조가 좋아야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서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 중심으로 조직을 이끌려고 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면, 조직이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조가 좋고, 구성원이 사심없이 일하고, 외부의 간섭이 없이 (기존 조직 밑에 있지 않아야)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어야, 그 조직이 열보다 빛을 더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자치 조직들은 서로 상하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공동의 목적으로 자원하여 협조할 수 있습니다. 명령 관계가 아닙니다.

유란시아서에 따르면, 일은 중요해도 자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555 페이지, 5 문단)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입으로는 떠들어도, 사실은 자아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애쓰느라고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일할 여력이 남지 않지요.

기존 교회조직에서는 사제와 평신도가 상하 관계가 있고 경제적으로 말하면 분업화되어 있습니다. 평신도는 돈만 내고 예배만 보고, 그 물질로 집권층에서 마음대로 개인 또는 소수의 이익과 권력을 키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지요. 아버지는 아이들과 직접 이야기하기를 원하고, 아이들 하나 하나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다른 존재가 사이에 끼어서 중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낀 존재들은 아이들보다 더 거룩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특별한 권한이나 능력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는 존재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아이들입니다. 유란시아서에는 신자들이 스스로 양식을 받도록 노력하지 않고 사제들이 떠먹여 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는 데 의존하는 폐단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각자가 시간을 들여 봉사하고 각자가 번 돈으로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서, 하나님은 아이들 각자가 영적 근육을 발달시키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중앙집권적 조직이 아닌 조직이 바람직합니다. 각 조직의 적정한 회원수는 각 그룹의 형편에 따라 자기들이 자연스럽게 정하면 되겠지요.

예를 들어 10명 내외의 사람들이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이 공부하고, 또 배운 것을 실천하려는 뜻을 가지고) 각자가 얼마큼 돈을 낸다든가 시간을 낸다든가 가진 능력을 사용하여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모임이 바람직합니다. 실천하려면 우선 책을 이해해야 하고, 책이 어려우니 같이 공부하면서 서로 이해를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고, 또 스스로 읽도록 자극하는 공부하는 그룹이 필요합니다. 조그만 모임이니, 돈을 기부해라 말라 말할 필요가 없고, 사정을 각자가 아니까 각자의 뜻대로 돈이나 시간이나 재능을 내면 됩니다.

일단 이러한 모임이 커지면, 편리상 둘로 나누고, 또 커지면 또 나누면 됩니다. 이렇게 생긴 자치 조직의 수가 늘어나면, 이들을 상하로 조직하면 안되겠지요. (사도 바울은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지요.) 이들을 옆으로 연결시키면 됩니다. 한 조직이 다른 조직에게 명령을 내린다거나 권력을 행사하면 중앙집권 조직으로 변질되니, 이것을 처음 조직하는 헌장에 중앙집권 조직화를 막도록 명시하면 됩니다. 그리고 1년에 한번 정도, 또는 필요에 따라, 모든 조직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공부하는 모임을 가질 수 있겠지요.

기존의 중심된 유란시아 조직들은 대부분 중앙집권적 조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중앙 집권 조직은 교회나 마찬가지로 대체로 헌금을 요구합니다. 교회는 아니더라도, 교회나 마찬가지로, 남의 돈을 받아서 소수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될 여지가 있습니다.

자치 조직일 경우에는 한 조직이 필요에 따라 사업을 벌이면 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큰 돈이 필요하다면, 물론 다른 자치 조직의 협조를 얻는 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은 분업화, 전문화입니다. 한 사람은 돈만 내고, 다른 사람은 쓰고 영광을 받거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딸 각자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똑같이 애를 쓰고 일을 함으로서 영적 경험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중앙집권화된 조직의 폐단은 사제들만 성경을 공부하고 평신도들을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모르게 만드는 우민정책을 1500년 정도 써온 것입니다. 예배 의식은 라틴어로 하고 신도들이 성경을 모르므로, 르네상스 전후로 이태리의 대도시 (베니스, 플로렌스, 로마) 등에서 돈을 많이 벌고 헌금이 늘어나자 사제들이 이를 자기들의 권력을 늘이기 위하여 비싼 그림을 그리고, 큰 교회를 짓고 그러다가 돈이 모자라서 더 돈을 걷다가 1517년에 마틴 루터에 의해 비난을 받고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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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2.내려오는 필사자는 왜 내려 오는가?

<답변 내용>

내려오는 분들은 대체로 우리보다 높은 등급의 존재들입니다. 예를 들면, 미가엘은 내려오는 하나님의 아들 등급에 속합니다.
아담은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등급의 아들이지만, 대체로 올라가는 부류에 속합니다. 필사자들과 함께 올라 갑니다. 그러나 유란시아에 왔던 아담과 이브처럼, 내려 왔다가 무슨 실수를 저지르면, 불멸 자격을 잃고 필사자로 강등되나, 다른 필사자와 같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갈 기회가 주어집니다.

필사자가 수십억년 훈련을 마치고,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최후자가 되면, 다시 (같은 곳은 아니라도) 사람들이 사는 어느 별에 가서 그런 인간들을 돕는 일에 수고하느라고 내려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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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1.평범하게 산 사람, 유란시아서를 읽고 믿은 사람, 수십번 읽어 통달한 사람,
              기본 개념만 알고 유란시아서를 전하는 데 기여한 사람에게 하늘에서 대우가 어떻게 다른가?

<답변 내용>

물론 가봐야 알겠고, 추측만 해볼 수 있겠지요.  평범하게 산 사람은, 예수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았다면, 그에 따라서 대접을 받겠지요.

유란시아 서를 읽고 자기 나름으로 믿었다고 생각한 사람, 정말로 믿었고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정말로 믿었어도, 갑자기 암으로 죽는다면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 시간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이 정말로 믿었다면, 알아서 대접할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마지막에 회개한 강도처럼.

수십번 읽고 내용을 통달한 것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요. 알고도 행동하지 않았다면, 책임이 더 크겠지요.
기본 개념만 알고 그것을 믿었으면, 반드시 행동하게 됩니다.

1780 페이지, 다섯째 문단에 로단이라는 그리스 철학자가 말한 것을 유란시아서에 포함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적극적으로 선교하는 전도사가 되지 않으면,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관념일 뿐이고, 스스로 믿는다고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넷째 문단에는 “종교는 행위이다”라고 하지요.

물론 1부, 2부, 3부가 다 흥미 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하늘 가는 사람들에게는 4부가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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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0. 사람이 부활할 때 재상할 가치가 있는 것만 재생한다는데 그 구체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답변 내용>

사람이 부활할 때 무엇을 재생한다는 것은 없어진 것을 다시 만든다는 뜻이므로 표현이 약간 이상한 듯합니다. 조절자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534 페이지)

일상 생활에서 물질적인 정보, 예를 들면 밥을 먹을 때 무슨 반찬을 먹었다는가, 무슨 옷을 입었다는가, 좋은 학교나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했다든가, 돈을 얼마 벌었다든가 하는 정보는 다음 세상에서 전혀 쓸모가 없으므로 보존하지 않습니다. 조절자는 사람의 경험 중에 지적, 영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을 저장합니다. 예를 들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과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그것은 지적, 영적 가치가 있지요. 사람을 사랑한다든가 아이를 기른다든가, 일을 열심히 하고도 실패하는 경험, 또 성공하는 경험,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다음 세상에서 일하는 데 아주 지장이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지적 영적 경험을 하는 것은 빈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물질 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지적 영적 경험이 따라서 생깁니다. 무슨 반찬을 먹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먹을 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누어 먹었다는가, 자기가 먹지 않고 남이 먹도록 애를 썼다는가 하는 것은 영적 경험이고, 알기만 하고도 실천히 없으면, 그 지적 지식이 빈껍질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영적 가치가 없는 지적, 물질적 생활은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보면 됩니다. 자연 과학을 열심히 공부해도 인류에게 영적인 바탕이 없으면, 아는 것이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세상에 해롭게 이용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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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9. 종교는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가?

<답변 내용>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으니, 일생에 무슨 일을 하는가는 사람의 뜻대로 해도 됩니다. 그러나 택한 일을 어떤 방법으로 행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옳은 방법과 그릇된 방법이 있겠지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는 속담은 옳지 않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가?
하늘나라에 가는 데는 지식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입문 시험이 있지만, 대학입학시험과 같은 것이 아니지요, 무엇을 아는 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했는가, 어떻게 했는가를 평가하지요.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2009 페이지에 한 강도는 일생동안 자기 딴에는 애국적 항거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해치는 나쁜 짓을 행했는데 (애국하는 방법이 나빴지요)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예수님에게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예수님은 그가 언젠가 파라다이스에 함께 가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사람이 분명히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죽지 않고 더 살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사회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을 것입니다.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남은 여생을 쉽게 살고 세상에서 인정받고 즐기면서 살다가 가려고 합니다.

유란시아서에는 하나님을 믿으면 분명히 남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교리에 머리를 끄덕이고 찬성하는 정도로 천국에 갈 수 있는가는 의심스럽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시간이 주어졌으면, 믿음은 꼭 착한 행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축복받은 강도는 자기의 믿음을 증거할 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지요. 그러나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충분히 행위할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열매가 없으면, 나중에 많이 놀라게 되겠지요. 일생동안 자신이 “이만하면 됐겠다”하고 착각하고 살았을 터이니까요.


1828 페이지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보다 훨씬 적다, “구원을 찾는 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갈 수 없도다” 하는 이야기는 구원을 찾는 사람들 중에 반 이상이 미끄러진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내가 잘못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어려워도, 진심으로 구하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미끄러져서 천국으로 못들어가는 사람은 진심으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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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8. 영적 성숙

존경하는 유박사님

구체적인 지식 대단히 감사 합니다 . 묻고 싶은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1. 영적 성숙도 7 단계는 어떻게 메기며 어떻케 상승합니까?
2 .예수의 종교는 행동인데 일반적 삶 보다 또 다른 행동을 요구 합니까?
여기에 진리에 빛에 따라 행동 않으면 우주가 반응 안한다는데 여기 예수의 종교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지
3 사람이 부활을 할때 재 생할 가치가 있는 것만 재생한다는데 그 구체적인 가치는 무었입니까
4 침례자요한에게 예수는 다음세상에서 너는 보상을 받으리라고 한 그 보상은 무었입니까?
5. 천사들이 이 유란시아 계시를 인류에게 준 근본 이유는 무었입니까?

<답변 내용>

질문 1.영적 성숙의 7 단계
유란시아서에는 영적 성숙도를 7 수준으로 나눕니다. 자신이 몇 급에 속하는가를 판단하는 일은 아주 어렵고, 남이 어떤 수준에 있는가를 재는 것은 더욱 어려우니, 이 대답은 자신의 성숙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고 남의 수준을 재거나 판단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유란시아서도 자세히 7단계를 모두 구분하지는 않고 대강만 언급하였으니, 나머지 내가 덧붙이는 것은 짐작에 불과하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무급 = 무신론자, 하나님을 모르는 자, 하나님을 이해할 영적 머리가 없는 자.
사람 중에도 전혀 하나님을 이해할 영적 머리가 없는 사람은 그냥 무급에 속하고, 천사들로부터 최소한의 보살핌을 받기는 하지만, 그냥 동물로서 살다가 죽는 것 같습니다.

7급, 6급 = 어느 정도 도덕적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람. 이 수준에서는 생각 조절자가 비로소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지요. 이 수준에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주로 필요할 때 누를 수 있는 버튼 정도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단계입니다. 무엇이 필요해서 달라고 부탁할 때 하나님을 부르지요. 수호 천사 1명이 7급 사람 천명을 돌봅니다. 6급은 천사 1쌍이 500명 씩 돌봅니다.

5급 = 수호 천사 1쌍이 100명을 돌봅니다.

4급 = 수호 천사 1쌍이 4급 사람 10명을 돌봅니다.

3급 미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기나 일생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를 빼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준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최상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면, 예비군에 징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3급 = 수호 천사 2명이 24시간 교대하면서 따라 다니고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돌봅니다. 이 수준에서는 동물적 욕구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이 수준에 도달하면, 그를 믿기 때문에 (스스로 행동하는) 조절자가 마음 놓고 때때로 자유롭게 몸을 떠나서 다른 일을 보기도 합니다. 조절자가 사람이 잠잘 때 교육을 시킵니다.

운명 수호천사는 (1) 하나님을 닮아야겠다고 최고의 결정을 내리거나 (즉 하나님의 뜻대로 일생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거나), (2) 3급 수준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3) 운명 예비군에 속했을 때 그런 사람에게 배치됩니다.

운명 예비군의 숫자는 약 천명 정도밖에 안되니, 현재 지구의 인구를 80억이라고 보면, 겨우 인구 8백만 중의 한 명이 됩니다. 누구나 입으로 하나님을 닮아야겠다고 말하기는 쉽겠지만, 그 사람이 정말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어쩐지는 하나님이 아시겠지요.

1급 = 조절자가 하는 말씀이 귀에 비교적 잘 들립니다. 이 등급을 졸업한 사람은 우리가 알기로는 에녹과 엘리야 정도 밖에 안됩니다.어떻게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는가?

3급에 준하는 예비군의 이야기를 먼저 하지요. 예비군에 뽑히는 것은 원해서 뽑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존재들의 필요에 따라서 영적 잠재성이 있고 훈련을 받는 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사회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뽑힙니다. 이들은 사회의 위기에 문명의 붕괴를 막는 사람들이지요. 내 생각에는 아브라함 린컨, 처칠, 한국의 이순신 장군 등, 그리고 이름이 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3급에 있는 사람은 모든 물질적 육체적 욕심이 없는 사람이니, 도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일생을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내 생각에는 3급, 또는 그 이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수준에 도달하기는 아주 어렵지요. 보통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사실은 자기의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추구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이 수준에서 턱걸이를 못하고 떨어지는 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1829 페이지에 보면,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예수가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하십니다. 하늘나라 일을 하면서 자기 이익도 조금씩 챙기려는 모든 사람이 여기에서 걸려 넘어지지요.

“우리가 당신과 어울려 먹고 마시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리고 당신의 우리 거리에서 가르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당신의 말씀을 죽 들어왔고 봉사도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하늘나라에서 사심없이 봉사한 자”들 사이에 끼워줄 수 없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런사람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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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7. 요한계시록

유책에서는 요한 계시록을 어느정도 설명해주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계시록은 언제 다 알수 있습니까?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 이외에 알수 가 없다고 하기에 질문 드립니다

<답변 내용>

요한 계시록 (Apocalypse of John)
Apocalypse = Apo (from) + calypso (hidden, cover) = revelation (계시).

누가 썼는가?
학자들은 사도 요한, 팟모 섬에 추방된 요한, 장로 요한 (Presbyter Johan) 등 다른 인물들이 이 계시록을 썼다고 보기도 합니다. 요한 2서와 3서에는 저자가 elder (장로)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이 장로가 Presbyter John 이라는 추측은 Fragments of Papias (파피아스의 조각들)에서 자기가 장로들한테 배웠다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현존하는 파피아스의 글은 바울의 편지들이 교회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을 때, 아직도 사도 또는 예수를 가까이 따르던 자들의 입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를 중요시하던 때에 쓴 글이고, 파피아스는 사도 요한과 장로 요한을 분명히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후자가 사도 요한 보다는 더 젊거나 후일의 제자였던 듯합니다.



유란시아서에는 사도 요한 자신이 쓴 편지는 요한 1서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요한 2서와 3서는 사도 요한이 쓰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가짜라고 볼 수 있습니다.학자들도 요한 1서를 쓴 사람과 2서 3서를 쓴 사람이 다른 것을 인정하는 듯합니다.

유란시아서의 계시록 견해
1555 페이지에는 요한이 팟모 섬에 추방되었을 때 계시록을 썼다고 하지만, 대부분이 없어지고 누가 어떤 부분은 빼버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잡글을 더했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상태로는 요한 계시록이 기독교 신자들한테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요.

계시록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특히 4-22 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양 (lamb of God)이 피를 흘려 대속한다는 세례자 요한의 어떤 제자가 썼을 것이라 추측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요한이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하니, 속죄 사상의 바울이 만든 이론이니까 아마도 속죄 사상에 깊이 빠진 어느 바울의 제자가 썼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양을 언급하는 말도 요한 복음에는 amnos (그리스어) Þ agnus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계시록에는 그리스어로 arnion (lamb) 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요한 복음은 유창하게 그리스 어를 잘 쓰는 사람이 쓴 것이고, 계시록은 외국 사람 (예를 들면 유대인)이 서툰 그리스어로 썼고 문법도 많이 틀렸으므로 다른 저자인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도 그리스어로 썼지만, 서툰 그리스어로 썼다고 합니다.

계시록의 종합 평가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유란시아서에 씐 대로, 물론 요한이 처음 계시록을 쓴 것은 확실하지만, 현재 성서에 남아 있는 계시록은 인사말 정도를 제외하고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현존하는 글은 전혀 다른 사람이나 사람들이 쓴 것이 확실합니다.

언제 썼나?
기독교인의 박해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네로 황제 (64-68 AD) 나 도미시안( Domitian, 81-96 AD) 황제가 있을 때 썼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 정확한 연대는 아직 분명치 않다고 봅니다.

내용 : 큰 시련이 있고, 아마겟돈 전쟁이 있을 터이고, 예수가 재림하여 큰 재판을 하고 (19장), 1천년을 다스리며 (20 장 3절), 새 하늘과 새땅이 있으리라 (22 장),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들은 불못 (지옥)에 던져진다 (20장 15절)는 것.
이상의 내용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큰 차이가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똑똑히 알아들은 요한이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왜 썼는가?
일제 시대에 일본 사람들 밑에서 억압을 받고 살던 사람들은 로마 사람들의 폭정 밑에서 살던 유대인들의 심정을 잘 알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한 가지 생각은 언제 이 세상이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구하여고 큰 전쟁이 일어나고, 메시아가 언젠가 와서 자기들이 학정 밑에서 고생하는 이 세상을 완전히 때려 부수고, 메시아가 새 천년, 새하늘과 땅에서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꼭 그렇게 되리라고 강조하는 글이지요, 요한 자신이 쓴 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으니, 저자의 이름만 빼 놓고, 속죄 이론에 깊이 빠진 어느 유대인이 서툰 그리스어로 기독교 신자라기 보다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으로 신자들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거의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먼저 말합니다. 천국에 가는 데 필요 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니고, 대체로 쓸데없는 글이 신약에 들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처음에 신약을 경전으로 수집한 사람은 마시온 (Marcion)인데 서기 144년 경에 그가 편집한 신약은 (Gospel and Apostolikon) 계시록이 들어가 있지 않았고, 바울의 편지 10 통과 누가 복음의 대부분이 들어가 있었지요. 마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이 다르다는 이론을 내세워 이단으로 몰렸던 사람입니다.

콘스탄틴 대제의 노모 헬레나가 (당시 80대) 예루살렘에 다녀온 뒤로 아들을 설득하여, 콘스탄틴 황제는 50 성당 (basilica, cathedral)을 짓고 각 성당에 비치할 양피지 경전을 만들 비용을 내겠다고 했을 때, 유세비우스는 아직 신약 경전이 정해져 있지 않았으므로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였지요 (325년).



(Painting of Nicene Council, Vatican Museum),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아마 콘스탄틴 대제. (니케아 종교회의 그림, 바티칸 박물관)


이때 유세비우스는 계시록을 자기가 추천한 신약 목록에 집어 넣었고, 그 뒤에 몇 십년이 지나서 지금 우리가 보는 신약의 내용이 정해졌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필기 시험에 좋은 성적을 받아야 가는 것이 아니고, 유란시아서에 쓰인 대로 종교는 행동이요, 아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카토릭 교회에서는 교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우민정책을 오랫동안 (16세기까지, 그리고 그 뒤에도) 써왔습니다. 많은 성경 학자와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이 요즘도 요한 계시록은 혼자만 아는 것처럼 풀이하고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는 목적으로 계시록을 이용하면 안 되겠지요.

디모데 2서 3장 16절에는 성서가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교회에서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성서라는 것은 구약을 언급하는 것이었고, 4복음이나 바울의 편지는 아직도 scriptures 의 신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율법에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카토릭 교회에서 교회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 악용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계시록 22:18 에는 아무도 계시록에 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면 저주를 받고 생명나무를 같이 나눠가질 수 없다고 협박합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에 글쓴이가 요한의 원작품에다 이미 그렇게 손을 댔고, 남이 다시 자기의 글에 손대는 것을 막아보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러한 협박을 하지 않았겠지요, 요한도 나이가 지긋이 든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덜 간섭한 듯합니다.

예수의 다시 오심
마태 복음 13장32절에는 천사도 아들도 언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합니다.
1912 페이지에는 사람의 아들이 땅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파라다이스 회의에서만 알고, 천사들도 그때를 모른다고 합니다.
589 페이지에 보면 혹성의 시대를 일곱으로 구분합니다.

1.혹성 영주 이전 시대
2. 혹성 영주 이후 시대
3. 아담 시대
4. 아들 행정관 시대
5. 수여 아들 시대
6. (삼위일체) 아들 교육자 시대
7. 빛과 생명의 시대

유란시아에는 아담이 왔고, 아들 행정관이 오지는 않았어도, 비정상 구체임을 참작하여, 아보날 수여 아들이 오는 대신에 미가엘이 직접 왔다고 합니다. 다음 단계는 삼위일체 아들 교육자들이 오겠지요.

다음에 빛과 생명의 시대가 올 때, 이 아들 교육자들이 물러나지요. 루시퍼 반란은 이 책을 기록하던 당시에 재판을 막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직 아들 행정관 시대를 거친 적이 없으므로, 유란시아서는 아보날 아들이 혹시 방문올 수도 있다고 추측합니다. 어쨋던, 아보날 아들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지만, 아들 교육자는 꼭 와야 됩니다. 그러면 위의 순서를 볼 때, 아직 아보날 아들은 오지 않았고, 수여 아들은 2000 년 전에 왔으며, 아직 빛과 생명의 시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니까, 지금 현재는 어떤 단계인가는 아무도 모르고 어떤 추측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멜기세덱이 기원전 1900년 경에 왔고,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왔다면, 지금쯤 무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때가 되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유란시아서가 다섯째 섭리시대적 계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보날이나 아들 교육자도 보내지 않고 그렇게 중요한 계시를 준다는 것은 인류의 계몽을 관장하는 계시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조금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현재 계시위원회의 회장은 멜기세덱이고, 데이날의 도움 없이도 일을 잘 처리할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5번째로 큰 계시라는 개념은 위의 혹성 시대와 상관이 없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본 것입니다
.


(A mosaic of Melchizedek, St. Vitale, Ravenna. 라베나는 한때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Justinian 황제 당시에 (527-565 AD) (* 아벨이 멜기세덱에게 양을 바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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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6. 영과 진리로

예배는 우주아버지에게 드린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는 아버지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찻고 있다고 말씀 하셨는데요 그러면 소위 기독교에서 드리는 예배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유란시아에 나오는 예긴지는 모르 겠음니다만은 ?

<답변 내용>

혹시 내가 잘 이해를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이해하는 대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1614 페이지에, 영어로는 날다라는 여인과 시카의 우물에서 하시던 예수님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God is spirit, and they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이 말씀을 “우리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뜻으로 직역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이 아직 아니므로 영으로 (as a spirit, or with a spirit) 아니면 진리로 (as a truth or with a truth) 예배한다는 것은
말이 모순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in spirit ) 그리고 진실하게/진지하게, 또는 진실/진리 가운데 (in truth)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뜻이 더 잘 통할 듯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과 일대일 교통할 때에,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씀일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 드리는 예배는 엄밀한 의미의 예배와 기도가 섞여 있습니다.
순전한 의미의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요, 조금이라도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무엇인가 하나님께 부탁할 때는
예배가 아니라 기도가 됩니다. 이 차이는 예수님이 1616 페이지에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기독교에서는 보통 이 두 가지가 섞인 것을 예배라고 또 기도라고 합니다.

예배는 보통의 경우에 여러 사람들이 집회에 모여서 드리는 대중 예배이니까, 일대일의 교통과는 좀 다르겠지요.
예수님이 말씀하다시피, 자기 속에 있는 기도는여러 사람 앞에서 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조용한 곳에서 하라고 하셨지요.
대중 앞에서 하는 기도는 목적이 때에 따라 또 대중의 필요에 따라 기도가 달라지겠지요.
대중 예배는 개인적 예배와 또 다르지요,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드리는 기쁨이 몇배로 늘어나기도 합니다.
대중예배에는 또한 친교가 따르는 데, 서로 친교하면서 신앙심을 기를 수도 있고,
한편 우리가 아직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불협화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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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미가엘의 일곱 번 수여에 관련하여...

 

첫 번째로, 아버지ㆍ아들ㆍ영의 통합된 뜻,   둘째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뜻,   셋째로는, 아버지와 영의 뜻,  넷째로는, 아들과 영의 뜻, 다섯째로, 무한한 영의 뜻,    여섯째로, 영원한 아들의 , 일곱째이자 마지막 수여에서는, 유란시아에서 우주의 아버지의 뜻에 지배되었다.(120:0.4)

질문 1 :이 일곱 번 수여는 일곱 초우주와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질문 2 왜 이렇게 일곱 번이나 수여하나요?

질문 3 저는 기독교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삼위일체 개념을 알게 되었는데, 마지막 수여가 아버지의 뜻에 지배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아들의 개념만 있다가 유란시아서를 알면서 아버지의 개념이 너무 확대되어 예수님께 조금 많이 미안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유란시아서를 읽는 어떤 분들은 4부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하는데 창조자 아들로서 오신 미가엘의 수여에 대하여 창조자 아들의 초점에 맞추어 4부 예수님의 생애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내용>

질문 1과 2. 미가엘 또는 아들 창조자는 자기가 속하는 초우주에 속하고 배정받은 지역에서 지역우주를 먼저 만든다. 그 우주를 운영하는 데는 크게 보아서 일곱 가지 다른 신분의 지음받은 존재들이 있다. 이 중에서 크게 보아서 세 계급은 천사 종류 (멜기세덱, 라노난덱, 그리고 상천사) 이고 ,

 세 계급은 사람의 세 승천 단계이고 (마지막에는 우리와 같은 필사자, 다음에는 상물질 몸을 입은 존재, 그리고 파라다이스에 가기전에 네바돈을 졸업하고 나서 초우주의 서울 유버르사 순례자로서) 나머지 하나는 아담이다. 물론 아담은 필사자는 아니지만, 실수할 경우에는 사람처럼 된다.

자기가 지은 존재들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뜻을 무시하거나 죽일 권한이 부모에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그래서 지음받을 존재들을 처음에 군주로서 다스리는 것은 임시 권한이고, 파라다이스의 감독을 받는다. 적어도 이것은 7번 자기가 만든 우주의 생물의 형태를  입고 그들과 같은 존재로서 살아보는 경험이 있기 전까지는 그렇다. 이러한 수여경험은 모두 미가엘이 속한 초우주에서 일어난다.

미가엘의 경우 6번의 수여 경험은 자기가 지은 네바돈 우주에서 일어났지만, 한번은 초우주의 수도 유버르사에서 (경험이 많은) 하늘가는 순례자로서 수여 체험을 마쳤다.  수여 체험을 겪는 이유는 다스림을 받는 존재로서 그들과 같은 체험을 겪음으로 그들을 더 이해하고  사랑으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7번 수여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아직도 한 번도 실패한 미가엘 아들이 없으니 꼭 성공한다고 보아도 좋지만),
이 미가엘 아들은 그때부터 아무런 파라다이스의 간섭이 없이 다스려도 좋다는 허락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받는다. 그때부터 이러한 미가엘은 주 아들(Master Son)이라고 부른다.

미가엘의 일곱 수여는 119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예수님은 물론 자기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함으로 유대인의 미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다, 요한 8:58).

처음에는 (거의 10억년 전에) 멜기세덱들이 사는 별(구체)에서, 지은 아들들 중에 가장 높고 권한이 많은 멜기세덱으로 나타나서 훌륭하게 수여임무를 마쳤다. 아마도 일곱 수여중에서 상대적으로 쉬웠던 듯.    두번째에는 (거의 8억 5천만년 전에) 팔로니아 체계에서 반란이 생겨서 그 후임으로 라노난덱 아들로서 임무를 마쳤다.  세번째는 (네바돈에서 두번째로 체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어느 체계본부에 물질 아들, 아담으로 일을 마쳤는데, 그 성공담을 이야기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하여 글쓴 중도자가 서운해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남으면 이 흥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요. 네번째는 언제 수여생활을 했는가 기록이 자세히 없다. 천사들의 본부에 어느날 Supernaphim , 지역우주의 한 상천사로 나타났으며, 어느 삼위일체 아들의 수여 임무에 부속되어 일했다.  다섯번째는 3억년보다 조금 더 전에, 오르본톤 초우주의 수도, 유버르사에서 (영의 모습을 하고) 하늘가는 순례자로 나타났고 이름을 에벤톳이라 하였다.

이곳 Uversa 는 Ursa Major (북두칠성)을 지칭하는 듯하다. 마치 Jerusem (예루셈 )이 체계의 수도를 지칭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는 아마도 Jerusalem이 영적 의미에서 지구의 수도 역할을 한 것 같이. 우리도 언젠가는 여기를 거쳐야 하고 유버르사 말을 배워야 한다. 여섯번째는 어느 별자리의 본부 혹성에서 상물질계의 필사자로 나타났다. 이 단계는 사람이 살아남아서 바로 거치는 단계이다. 일곱번째는 2천년 전에 유란시아에서 아기로 태어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까지 우리와 똑같이 필사자의 경험을 겪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4부, 예수님 편에 있다.

질문 3.
기독교인은 흔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예수님께 사정을 털어놓기도 한다. 기도와 예배가 범벅이 된 경우가 많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기도는 그 아들 또는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 향해서 말한다고 해서 두 분이 기분 나빠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이야기하거나 (commune with the Father) 예배하는 것은 (worship the Heavenly Father) 저절로 하나님 아버지께 올라갑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본인의 이익요소가 털끝만큼이라도 들어가면, 그 말에는 (물질이든 영적이든) 부탁이 들어 있으므로 무슨 말로 하든 그런 기도는 아들한테로 가지요.

다음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용어의 뜻을 구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미가엘은 아들 창조자, 곧 아들인 창조자 (Creator Son), 또는 아들로서 창조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창조자 아들이라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듣기에는 어떤 창조자가 아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 중의 한 아들을 지칭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 또는 창조자의 아들이지요. 그러나 이 명칭에는 예수님 자신이 창조자라는 뜻이 빠져버립니다).

예를 들면, 사장 아들이라고 하면 어떤 사장의 아들이 되겠지요.  선생 아들이라고 하면 어떤 선생님의 아들이겠지요, 마찬가지로 목사 아들이라면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겠지요.  게다가 목사 아들은 목사가 아닌 것이 (일 경우도 있겠지만) 확실하지요.  마찬가지로, 창조자 아들은 무슨 노릇을 하는지 그 명칭만 보고는 짐작할 수가 없지요.

다시 말해서 창조자의 아들은, 예를 들면 멜기세덱도 창조자의 아들이지만 창조하는 역할이 없읍니다. 아담도 창조자의 아들이지만 자식을 낳는 외에는 창조 역할이 없습니다.야고보 세베대가 어느날 예수님께 (1591) 어찌하면 우리가 사물을 똑같이 배우고 그렇게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대답이 한번도 사람들이 똑같이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기를 강요하고 어떤 교회는 똑같은 수많은 신조를 믿으라고 권하며 (갈릴레오도 쫓겨 날 뻔 했고, 마틴 루터는 실제로 쫓겨났지요),   동양 사회에서도 비슷한 압력이 적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물을 보는 눈과 생각하는 방법은 그 사람의 자라온 환경과 천성 등에 많이 영향을 받으니,  똑 같은 물건 또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당연히 차이가 있겠지요.  그러니 독자적인 견해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개발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어느 방향에서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보더라도, 예수님이 가르치려고 한 것은 꼭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와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이해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사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리고 가는 것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리를 놓는 일이지요. 구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거의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영인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직접 삶으로 보여 주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삶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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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부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부활되는 사람도 있고 천년마다 부활되는 그런 사람도 있다는데 그동안은 어디에 있고 뭐하는지 그리고 의식은 있는지? 그리고 일곱 저택 세계는 예루셈에 가가 전에 임시로 들리는 거처 입니까 그러면 여기 7가 과정에 왜 유버르사언어를 배워야 하는지 아시면 대답을 바랍니다.

<답변 내용>

아담과 이브의 부활;
유란시아에서 26번째의 특별 부활은 아담과 이브를 위하여 특별히 준비한 듯. 죽은지 사흘째에 아담과 이브는 첫째 동산에서 같이 일했던 1316명과 함께 부활하였다. 죽기전에 미가엘 (예수)로부터 소식을 받았는데, 자기 밑에서 일하는 하위 아들이 그들을 부활시키거나, 아니면 늦어도 그가 직접 올 때 부활시키리라는 통지였다. (35,000 년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예수가 부활했을 때, 미가엘은 아담의 섭리시대를 끝내고 아울러 섭리 시대를 끝맺는 부활을 지시하였다. 이것은 3번째 섭리시대 부활이었다. 첫번째는 50만년전에 칼리가스티아 영주가 왔을 때, 두번째는 아담이 왔을 때 섭리시대 부활이 있었다.

아이들 ;나이가 어려서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내릴 수 없는 아이들이 사고로 죽으면, 일반 부활이든 특별부활이든, 살아남은 부모를 따라간다.

어른 ; (약 20만년 전에 있었던) 루시퍼 반란 때문에, 필사자들이 살아남을 때 저택세계에 바로 가던 과정이 중지되었다. 이것은 자격을 갖춘 사람들도 저택세계에 갈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 상태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모세도 특별부활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모세는 아마도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을 터이지만)
예수님이 오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신 이후에 유란시아의 필사자들은 살아 남을 경우에 바로 자기 수준에 맞는 저택세계에 가도 좋다. (596:3)

네바돈 관례: 3급 이상에 도달한 사람들은 긴 잠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저택세계에 갔다.
4 급 이하의 사람들, 즉 수호 천사를 배당받을 영적 실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섭리시대의 집단 부활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341:1) 이것에 네바돈 우주에 두루 부활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이다. 여기에는 학급을 효과 있게 운영하려는 경제적 요인이 있는 듯. 아마도 수호천사를 배당받지 못할 수준에 있는 영적으로 더딘 사람들을 단체로 학급을 운영하려는 뜻이 아닐까.
이들은 무의식 속에 있다 (잠을 잔다). 말하자면, 이들의 신분에 관한 자료가 일종의 하드디스크 속에 저장되어 있다.

나중에 집단 부활이 있을 때, 이 자료와 상물질로 그 사람을 부활시킨다. 그 동안에 지나간 시간은 부활한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마치 어제 죽었다가 오늘 깨어난 듯 할 것이다. 물론 같이 가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몇 만년 일찍 또는 늦게 땅에서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요, 빨리가고 늦게 가는 것은 2차적 문제이다. 3급에 올라갔다가 낙제한 사람들도 있어서, 수호천사들이 마음 아파한다고 하니.

그러면 (341:1)과 (596:3)은 얼핏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어느 쪽이 맞는가는 각자 읽어보고 연구해 볼 주제이다.
틀린 의견일지 모르지만, 모순이 없는 것 같다. 1학년 자격밖에 없는 사람을 6학년으로 올리면, 고생하는 것은 학생뿐. 그러니 네바돈 전체에서 죽기 전에 (수호천사를 배당받고) 3급이상에 이른 사람은 바로 저택 세계에 보내고,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은 묵혔다가 한꺼번에 학급을 운영한다는 말인 것 같다. 특별 학생들을 저택세계에 보내는 길이 루시퍼 반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오순절 이후로 다시 열렸다는 이야기인 듯.

그리고 일곱 저택 세계는 예루셈에 가가 전에 임시로 들리는 거처입니까 ?
일곱 저택세계를 졸업하면, 예루셈에 간다. (필기 시험이 아니라 영적시험의) 성적이 나쁘면 다른 사람들이 도와 준다. 도와주느라고 천천히 졸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여기 7 과정에 왜 유버르사언어를 배워야 하는지 아시면 대답을 바랍니다.
넷째 저택세계에서 네반돈 말을 통달하고 다섯째부터 유버르사 언어를 배워야 하는데, 거기에 가는 도중에 초우주의 수많은 세계를 들리고 배우자니 그곳의 말이 필요하지요. //

<유란시아서 관련 기록>

853:3,4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언젠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서 저택 세계들에서 삶을 다시 시작하리라고 멜기세덱들이 한 약속을 굳게 믿고서 죽음의 휴식으로 들어갔으며, 저택 세계들 모두가 유란시아에서 보라 인종의 물질적 육체를 입고 사명을 맡기 전 시절에 그들에게 아주 익숙한 세계들이었다. 그들은 그 영역의 필사자들이 거치는 의식 없는 잠의 망각 속에서 오랫동안 쉬지 않았다. 아담이 죽은 뒤에 셋째 날, 경건한 장례식을 치르고 둘째 날에, 에덴시아의 임시 최고자의 지지를 받고, 구원자별에 계시고 미가엘을 대행하는 늘 연합한 이의 승인을 받은 라나포지의 명령이 가브리엘의 손에 쥐어졌는데, 이것은 유란시아에서 아담의 실수가 있었을 때 탁월했던 생존자들의 특별 점호를 지시했다. 그리고 유란시아 시리즈에서 제 26번 특별 부활을 지시하는 이 명령에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첫째 동산의 체험에서 동료였던 1316명과 함께, 사타니아 저택 세계들의 부활실에서 다시 성격화되고 다시 조립되었다. 충성한 많은 다른 사람은 아담이 도착할 때 이미 옮겨졌고, 잠자는 생존자와 자격을 갖춘 살아있는 승천자들의 섭리 시대 판결이 뒤따랐다.

341:1.2. 잠자는 생존자. 개인 운명 수호자의 관리 밑에서, 살아남는 지위를 가진 모든 필사자는 자연사의 문을 거치고, 셋째 기간에 저택 세계들에서 성격화된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개인 보호자를 가질 자격을 갖추게 하는 수준의 지적 숙련과 영성의 자질을 얻을 수 없이 인가된 자들은, 이렇게 즉시, 바로, 저택 세계까지 갈 수 없다. 그러한 살아남는 혼들은 신기원(新紀元), 새로운 섭리 시대의 심판 날까지, 오랜 시대의 점호를 부르고 그 영역을 판결할 하나님의 아들이 오기까지, 무의식의 잠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온 네바돈에 두루, 일반적 관례이다. 그리스도 미가엘이 땅에서 일을 마치고 높이 올라갔을 때, 그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되었다. "그는 큰 무리의 포로들을 거느렸더라." 이 포로들은 아담의 시절부터 유란시아에서 주가 부활할 때까지 잠자던 생존자들이었다.시간이 흐르는 것은 잠자는 필사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들이 휴식하는 길이를 도무지 의식하지 못하고, 잊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끝에 성격이 다시 조립되고 나서, 5천년 동안 잠자던 자들은 닷새 동안 휴식하던 자들과 조금도 다르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간 지연 외에, 이 생존자들은 길던 짧던, 죽음의 잠을 피하는 자들과 동일하게, 승천하는 체제를 거친다.

596:3,4 수여 아들은 한 세계이 필사 민족들의 영적 향상을 위하여 살다가 죽는다. 그는 "새로운 살 길"을 확립한다. 그의 일생은 파라다이스 진리가 필사의 몸을 입고 육신화된 것이요, 바로 그 진리--아니 진리의 영--을 아는 가운데 사람은 자유롭게 될 것이다.
유란시아에서 이 "새로운 살 길"의 확립은 진리의 문제 뿐 아니라 사실의 문제였다. 루시퍼 반란에서 유란시아가 고립된 것은, 필사자들이 죽은 뒤에 저택 세계들의 바닷가로 바로 통과할 수 있는 그 절차를 중지하게 했다. 그리스도 미가엘이 유란시아에서 계시던 시절 이전에는, 섭리 시대의 부활, 또는 1천년마다 특별 부활이 있을 때까지, 모든 혼이 계속 잠잤다. 특별 부활의 기회가 올 때까지 모세조차도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타락한 혹성 영주 칼리가스티아는 그러한 구원에 항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오순절 뒤로 죽, 유란시아 필사자들은 다시 상물질계 구체들로 직접 나아갈 수 있도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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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 (a confession of supreme devotion) 과
거룩한 헌신을 확인하는 것 (the validation of consecration)

devotion 과 consecration 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이것을 차별화 시킬 수 있는
예화들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답변 내용>

(위의 첫 구절은 최고로 마음을 다 바쳐 기도함을 고백하기라는 뜻. 다음 구절은
거룩하게 일생을 몸바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겠다는 의지를 확인하기라는 뜻입니다.)

제일 처음에 (1935 년에) 예수님 편을 받았을 때는 4부가 분량이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나서 다시 편집했을 때, 4부의 글을 여기 저기 무자비하게 자른 흔적이 보이고,
단어의 숫자를 제한한 듯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알아먹기 힘들게 축소한 문장들이 나타난 곳이 특히 마지막 논문에 많이 보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4부 뿐 아니라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4부에 두 낱말이 쓰인 예를 비교해 봅시다.

예수님이 13살이 채 안되어 성전에 가서는 다른 이스라엘의 청년들 처럼 율법의 아들이 되어 이스라엘의 시민이 되려고 성화를 받고, 또는 거룩하게 몸을 바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1377) 그리고 부모님이 떠난 뒤에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묵으면서 성전의 토론에 참여하고 돌아와서 말없이 기도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1382:2)

여기서 devotion은 기도할 때 온 마음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헌신이라기 보다는 헌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우리말 사전에는 그런 말을 쓰는 것 같지 않습니다.

바친다는 말은 “드린다, 준다”는 뜻이 있으므로, 바친 것을 다른 데 또 쓸 수는 없지요.  기도하는 순간에는 마음을 바쳐 기도하니까 그 말이 적절하지만, 기도할 때 헌신 하여 (몸을 바쳐)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조금 이상하지요.  consecration은 옛날 유대인들이 죄를 지으면 본인을 바치는 대신에 신에게 희생물을 바쳐 사함을 받으려고 했던 풍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식구 곧 아내, 딸, 첫 아들 또는 노예나 비싼 동물을 바치다가 (예, 에밀레 종, 심청전 등), 나중에 사람들이 머리가 깨이자,
실제로 희생물을 바치는 대신에 값이 덜 나가는 다른 물건을 대신 바치는 관습이 여러 나라에서 생기지요.
다른 부족보다 이스라엘은 이 관습을 일찍 벗어나 본인을 희생하는 대신에 일생을 거룩하게 삶으로서 몸을 바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의미로, consecrate = con (together, 라틴어로 “함께”) + sacrare (holy, 거룩한) + ate (act, make, 만든다는 뜻의 suffix (어미 인 듯)) = 집단의 예식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 사람을 거룩하게 바친다.

한국 교회에서 청년들이 헌신예배를 드릴 때 “일생 동안에 몸바쳐 주 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겠다”는 뜻을 알고
그런 예배를 드려야 하겠지요. 그러니 이것은 일생에 한번만 하는 것이고, 이를 연례행사로 취급하면 뜻을 모르고 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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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상물질 상지혜 27번항 질문 (유란시아서 p.557)

27. 진보는 개성의 발전을 요구하며, 평범은 표준화되어서 영속하기를 추구한다.
(Progress demands development of individuality; mediocrity seeks perpetuation in standardization.)
여기에서 individuality 는 개별적인 인격을 말하는 것 같고, mediocrity (평범)를 표준화시킨다는 뜻은
평범이라는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것 같고,'영속한다'는 뜻은 '영원히 지속한다'는 말 같은데 맞나요? Yes.
발전된 개성이 평범을 이루어 영원히 지속하기를 추구한다는 뜻이라면....아무래도 상물질 세계의 상지혜라서랄까?
웬지 모르게 간단한 진리를 우리는 너무도 어렵게 사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 내용>

(사회의) 발전은 사람들마다 개성을 발달시키고 다르게 살아가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mediocore = middle + okris. 그리스 말Okris = peak. 예를 들면, acrophobia (고소 공포증 ), acrimonious (날카로운, 찌르는),
acropolis (아테네, 코린트 등 그리스 도시의 산 꼭대기의 마을, 주로 신전이 있다) 등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높은 곳, 꼭대기를 의미한다. 즉 꼭대기에 이르기 전의 중간, 밑에 있지도 않고 꼭대기도 아닌 중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mediocrity 는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 보통 사람들,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뜻.

(아마디어스 모자르트 영화에 이 말이 자주 나온다. 마지막에 살리에리가 하는 말은
Mediocrity is everywhere, …, I absolve you (나는 너희를 사하노라).

우리말 속담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듯이 인류를 위해서 공헌을 하든,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든 뛰어나려면 희생이 따른다. 이처럼 개성이 강한 사람은 사회에 공헌을 하여도, 자신의 목숨이 짧아질 뿐 아니라 자식도 많이 낳지 못하고 낳아도 잘 기르기가 힘들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지켰지만, 그 가족은 적들에게 몰살당하였다.

반대로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되거나 사회에 공헌하거나 후세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해도 평범하게 자식낳고 무난히 살고
이처럼 오래 살아남기를 추구한다는 이야기를 간단히 줄여서 쓴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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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삼위일체에 관한 Trinity, Triodity, Triunity 에 대해서

삼위일체에 관한 Trinity, Triodity, Triunity 에 대해서 설명부탁합니다. 그리고 번역하신 분들마다 한국어 용어 통일이 안되어서 더 혼동스럽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단어들은 고유단어일 수가 있는데 용어가 제각각인 것은 독자들을 너무나 혼란스럽게 합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변 내용>

간단히 말하면, 삼위일체, 라틴어 Tres (three) + unus (one) = trinity (three in one). 그 형용사는 Triunue ( “삼위일체인” 이라는 뜻)
책에 있다시피, 삼위일체의 세분을 갈라놓을 수 없다. 완전히 일체이니까.

삼자일치 = 완전히 다른 세 주체가 일치하여 행동하는 것. 예를 들면 아버지, 어머니, 자식은 다른 세 주체이다.
그러나 세 사람이 한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하면, 이것은 삼자가 일치하여 행동하는 것, 따라서 삼자일치가 된다.
그러나 다른 세 주체가 항상 언제나 뜻이 같을 수가 없는 것, 어떤 때에 어느 곳에서 삼자가 일치되어 행동할 가능성은 있다.
삼위일체는 수학적으로 말해서, 세 분이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일치되어 행동한다면 (그럴 수는 없지만),
이것은 유한한 삼자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삼자일체가 삼위일체가 될 수 없다.

“위”란 말은 중국어로 우리 말에 “분”이라는 뜻. 세분이 한몸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세 분의 신,
즉 무한자들의 삼자일체를 말한다. 삼자일치는 기능을 가리킨다. 세 분이 같은 목적을 위하여 같이 일하는 것.
삼위일체는 신분, 언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한 몸이 된 상태를 말한다.Triodity는 아직 의미가 분명치 않다.
내용은 책에 설명이 되어 있지만, 이 단어 자체가 무슨 뜻이라고 자신있게 발표한 사람이 아직 없는 듯합니다.

Tri (세 ) + ode/odity or odd (odr = point, angle)
Ode = 예, (electr)ode = (전)극은 그리스말로 길(way )이라는 뜻,
예를 들면 그리스 말로 Exodos = Ex + odos = 나가는 길 ((에집트) 탈출, 출구),
eindos= in + odos입구, 세종 odos = 세종로 (그리스말로). 그러니까 글자 그대로 번역한다면,
triodity는 삼극일치, 삼도일치, 삼로일치,삼각일치등으로 번역한다면 한국사람들에게는 뜻이 전달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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